르완다 피난민

258호 – 르완다 피난민

지금까지 르완다를 위한 국제범죄재판소(ICTR)는 1994년 대량학살에 책임이 있는 후투족 우세의 정부의 국회 의원들만을 찾아왔다. 그러나 12월 13일에 국제 범죄 재판소의 최고 검사인 카를라 델 폰테는 국제 범죄 재판소는 또한 그 대량학살 이후에 정원을 잡아서 현재 르완다 정부가 된 투치족 르완다 애국 전선(RPF)을 조사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국제 범죄 재판소의 위임은 대량학살의 해였던 1994년에만 적용된다. 그러나 애국 전선에 의한 가장 잔학한 행위들은 애국 전선이 콩고에 있는 수 천명의 후투족 난민들 중에 수백 명을 찾아내 죽였던 그 다음해 3년 동안에 실행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들에 대해서 결코 조사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 사건들이 여전히 르완다 군대에 의해서 점령되어 있는 동부 콩고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 당시 르완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었던 콩고 정부가 과거 발생했었던 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유엔의 노력을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희생자들은 약진하고 있는 애국 전선 앞에서 도망치면서 1994년 르완다를 떠났던 후트족들이었다. 그들은 고마 근처에 있는 임시 캠프에 모여 있었다. 일백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었지만 유엔의 난민 고등 판무관(UNHCR)은 그들의 수를 셀 수가 없었다.

후트족들의 지위는 매우 뜨겁게 논의되었으며 사람들에게 그들은 희생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르완다 정부에 있어서 후트족들은 사법으로부터 도망한 자들로 여겨졌다. 그 임시 캠프는 패배한 르완다 군대와 그 대량 학살에 책임이 있는 의용군인 인터라함웨(Interahamwe)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군대와 의용군은 서로 다른 군 캠프에서 가깝게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주 캠프로부터 원했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국제법 하에서 콩고, 그 다음에 자이레, 또 다시 콩고가 피난민들을 위한 안전을 제공하며 싸우는 자들을 분리시켜야 했지만 국경 가까이서 무장하고 있었던 그들을 떠나는 것을 기뻐했던 고 모부투 세세 세코는 후투족의 동맹자였다. 그들이 르완다에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을 때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은 헛되이 국제적인 군대가 임시 캠프들을 통제해서 피난민들이 국경으로부터 뒤로 물러가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피난민들은 콩고 서부쪽으로 도망쳤다. 유엔 피난민 고등판무관은 그들을 추격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지역에 보내졌던 미국의 대공 감시 비행기는 두터운 숲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6년 11월 르완다는 국경을 넘어 공격했으며 약 60만 난민들이 르완다로 돌아가게 했다.

르완다 정부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말했지만 대량 학살이 보도되었을 때 르완다 정부의 정책이 르완다로 되돌아오지 않았던 어떠한 후푸족도 대량 학살의 죄로 다루게 되었다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르완다 군대가 1997년 콩고를 가로질러 나아갔을 때 르완다 군대는 그 군대 앞에 있는 생존해 있었던 피난민들을 몰아냈다. 아마도 15만 명이 지치거나 질병으로 죽었을지라도 몇몇은 콩고를 가로질러 걸어가서 콩고-브라잘빌레에 도착했다. 약 7천명이 아직도 그곳에 있다.

유엔 피난민 고등 판무관(UNHCR)은 6만 명이 아마도 콩고의 동부 지역인 북부 끼부에 아직도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UNHCR은 그들을 보호하거나 심지어 접촉조차 할 수 없지만 점령하고 있는 르완다인에 의해서 정해진 현지 폭동 지휘자들에 의해서 공급된 자료들에 의존해야만 한다. 1999년 41천명의 피난민들이 대체로 르완다 군대에 의해서 그러나 UNHCR의 협력으로 르완다로 송환되어졌다. 되돌아갔던 사람들 중에 몇몇은 처형되었다는 증거가 있다라고 UN근무자들이 말하지만 그것에 관해서 이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자료원: 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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