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테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1그는 신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론’과 ‘실천’을 결합시키려고 끊임없이 시도한 선교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적 지평은 예술과의 만남에로 까지 확장된다. 그의 대표적 저서로는 ‘선교신학사전Lexikon missionstheologischer Grundbegriffe(다산글방,2003)’, ‘미술과 신학’(한신대출판부, 2007) 등이 있다.지음, 채수일 엮어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9

현대선교 16 (Current Mission Trends): “선교적 리더십의 양성”. 발행 : 2014년 2월 28일, 서울:GMF Press. 수록면 : 168-177.

김영남
서평자 김영남 교수는 미국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M.Div.)을 졸업했으며, 이화여대에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고, 현재 한국선교연구원(kriM) 연구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선교”라는 말에서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보통 희생이나 자기 부인(否認)의 모습이 아닐까? 성경에서 선교의 이미지는 잔치와 초대이다. 저자는 선교를 ‘함께하는 잔치’라고 말한다.

시골 마을의 잔치가 얼마나 흥이 나는 것인지 경험한 사람은 알 것이다.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도, 초청받은 사람도 모두 즐겁게 참여한다. 정해진 절기 축제뿐 아니라, 느닷없이 일어나는 초상치례도 모두가 참여하는 잔치였다.

이 책은 잔치가 시간과 돈으로 묶여 버린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삶과 잔치의 선교학적 의미를 되새겨보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현존 앞에서 함께 할 종말론적 잔치를 기다리게 한다.

이 책의 저자 테오 순더마이어는 한국에 여러 번 방문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선교신학자들과도 깊은 교제를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평자는 순더마이어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가 중국 내지에서 온 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깊은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듣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책의 내용은 그 모습과도 관련이 있다.

번역 출간 된지가 오래 되었지만 [현대선교]제 15집의 주제 “자신학화”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어 서평하는 데 적절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선교신학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을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복음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이 주는 도전은 좀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프랑스 신학자 자끄 엘룰의 주장처럼 자기 신학이 요청되는 시점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의 세계 안에서 교회의 일치를 의미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을 경청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데오 순더마이어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에서의 선교경험을 바탕으로 선교신학적 성찰의 지평 확대에 기여한 선교신학자이다.

루터교 배경에서 성장한 그는 독일 라인 선교회(Rheinische Missionsgesellschaft) 파송으로 1964년부터 아프리카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975년 이후에는 독일 보쿰 대학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가르쳤다.

이 책은 논쟁적인 선교신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편역자가 저자와 협의하여 여러 논문들 가운데서 뽑아 엮은 것이기 때문에, 내용의 전개가 한 주제 안에서 발전된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주제들이 중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책 제목이 말하듯이 저자가 선교신학의 새로운 유형과 과제로서 제시한 논점은 ‘함께 하는 삶’인 ‘콘비벤츠Konvivenze’로 모아지고 있다.

이 책은 제 1부 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제 2부 선교신학과 해석학, 그리고 제 3부 선교신학과 코이노니아로 나뉘어 있지만 일관된 주제를 따라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제 1부는 선교신학이 형성되고 발전되어가는 배경을 고찰하면서 오늘의 선교신학의 과제인 토착화와 혼합주의 문제를 짚어보고 있는 이론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제목과 동일한 부제가 암시하듯이 저자의 신학적 의도가 다 드러나 있다.

근대 선교신학에서 논의되었던 선교의 유형들과 목적은 교회 내외 상황과 신학적인 문제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기독교 세계 안에서만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지평을 넓혀줄 사고를 요청한다.

그것은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이해하는 선교학이다. 타자에 대한 이해로 제 2부에서 저자는 해석학을 요청하며, 그 콘텍스트에서 발생한 자기 신학들이 보편적 신학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탐구함으로써 그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제 3부에서는 삶과 증언으로서 코이노니아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이런 코이노니아의 중요한 실천으로서 ‘콘비벤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펼쳐나가는 그 지평들은 결국 ‘콘비벤츠’에서 융합되어 선교의 새로운 유형과 과제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유형이 이미 성경 속에 그려져 있던 것임을 밝히고, 저자는 다만 성경 이야기 밖에서 발견한 언어, 즉 콘비벤츠를 성경적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에큐메니칼(교회의 일치)을 강조하는 저자의 사고의 유영(遊泳)은 문화들 간의 만남, 타자에 대한 이해, 문화토착화, 콘텍스트 신학, 해석학, 코이노니아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논술을 거친 후에 ‘콘비벤츠’라는 곳에 이른다.

이미 마련된 종말론적 잔치를 지금 여기서 맛보라고 사람들을 초대하도록 가르쳐주는 저자의 방식을 따라서 몇 개의 중심개념을 가지고 그와 함께 선교신학적 헤엄치기를 한 번해보는 것은 어떨까?

‘낯선 것’에 대한 이해

순더마이어는 선교신학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 모색을 주장한다. 이런 작업은 다른사람들의 목소리 경청을 요청하며, 텍스트와 콘텍스트, 상황과 해석의 밀접한 관계성을 보여준다. 증언은 각각의 이해의 틀에서 다르게 조명되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유대인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이해에 바탕을 두고 저자는 다른 문화와 그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선교를 이야기하는데, 이 ‘낯선 것’에 대한 이해는 선교학적 해석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타자는 낯익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낯선 다른 사람이다. 낯익은 타자는 우리의 습관적인 것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낯선 타자는 우리의 습관적인 것을 뜯어내는 새로운 생각과 행동을 가능하게 하고 예기치 않은 것을 위한 지평을 열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시련이고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런 면에서 낯선 타자는 만남에서 새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선교적 기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상황은 복음 선포 방법을 규정하기 때문에 선교학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조건들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문화간의 이해를 위한 해석학과 관련되어 있는 서구 해석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타인을 개인적 차원의 상대방으로 이해하지 않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공동체는 개인의 현존을 구성한다는 그의 인식은 개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콘비벤츠’ 개념으로 귀결된다.

이런 저자의 관점이 개인을 강조하는 루터의 신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궁금하지만, 신학적으로 콘비벤츠 개념을 모든 생명과 세계의 창조자에 대한 신앙이라는 큰 틀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그 조화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문화토착화

저자는 문화인류학 “Enkuturation”에서 선교학이 차용한 용어 문화토착화(Inkulturation)를 복음이 새로운 문화 속에 들어가 이전의 문화를 비우고(케노시스) 뿌리를 내리는 ‘성육신Inkarnation”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래야 비로소 다른 문화를 만났을 때 타자를 향해 귀 기울이고, 이해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야말로 모든 선교적 삶을 포괄하는 것이며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것들이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염려하게 되는 혼합주의도 토착화 과정에서 생긴 변화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염려에 대하여, 복음이 한 문화에 들어가 기존의 종교와 통합되고 새롭게 생성되어 그 사회에 생동적 영향을 미치는 ‘공생적 혼합주의symbiotischer Synkretismus’를 설명하면서, 기독교가 생동적인 민중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러 종교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문화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성숙한 혼합주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낯선 문화와 종교의 세계에로 교회를 이끄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저자는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곳에서는 이런 공생적 혼합주의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의 정체성이 위협받게 되는 것은 종교체제들의 만남에서 수평적으로 나타나는 종합적 혼합주의synthetischer Sykretismus로 빠질 때라고 저자는 지적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종교적 상황은 종합적 혼합주의 못자리가 되어있지나 않는지 염려스럽다.

콘텍스트 신학

콘텍스트 신학도 보편적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있어, 저자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보편타당성을 얻게 된 콘텍스트와 보편성 사이 긴장을 추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콘텍스트에 의해서 생겨난 다른 신학들도 보편성을 지닌다는 것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아프리카 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일본의 십자가 신학, 그리고 한국 민중신학 등을 콘텍스트 신학으로서 두루 살피고 있는데, 그것들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처럼 콘텍스트 한계를 넘어 보편적 신학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당시의 교회와 유럽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바울과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나 있고, 그것이 그 시대와 주변 환경의 절박한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서 형성된 콘텍스트 신학이라고 할 때, 인간의 삶의 콘텍스트 안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성이 있고 또 거기에 응하는 답의 보편성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유럽신학자로서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학들이 다른 콘텍스트 안에서는 얼마나 낯설게 보일까 우려하며 저자는 서구에 낯선 신학들을 소개한다. 그는 신학에서 콘텍스트에 의해 생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언어적 진술의 방식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콘텍스트 신학을 탐색하는데 있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열정은 그의 저서 ‘미술과 신학’에서 여러 그림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여러 지역의 그림들과 그 해석에 콘텍스트 신학으로서 자리를 부여하고 있는 저자는 콘텍스트 신학으로서 한국의 민중 신학과 미술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1970, 80년대 후반기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생성된 민중신학은 갈릴리에서 예수가 함께 했던 ‘민중(오클로스ochlos)’의 현실을 당시 한국의 민중에게서 발견한다.

남미의 해방신학과는 달리 민중 신학에서는 ‘오클로스’개념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오클로스는 ‘소속이 없는 인간들’로서, 예수의 삶과 죽음은 그들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한 것이었다.

예수의 부활 메시지가 갈릴리 민중에게로 간 사건을 현재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쇠로 삼은 민중신학의 과제는 민중이 자기 주체적 역할과 어떻게 하나님이 민중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지를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함께 함’의 의미에 강조점을 두고 볼 때, 민중신학은 저자가 이 책에서 중심어로 삼고 있는 콘비벤츠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민중신학이 선교신학의 보편적 유형으로 제시되지 못한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콘비벤츠Konvivenze

저자의 선교신학적 여정의 귀착점으로서 콘비벤츠는 종말론적인 ‘함께 하는’잔치를 함의하고 있다.

데오 순더마이어가 자신의 선교신학적 논지를 이끌어가고 있는 “함께 하는 삶” 콘비벤츠(convivenze)라는 용어는 원래 브라질의 빈민도시나 농촌에 있는 소집단들의 이웃돕기 운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로 돕고, 서로 배우며, 함께 축하’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말한다.

순더마이어는 예수의 삶이야말로 이 콘비벤츠의 원리를 입증한 것으로 보고, 과거 논의되어왔던 선교의 유형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유형으로서 콘비벤츠 개념을 들고 있으며, 이것을 이루기 위한 과제들을 이야기 한다.

저자 순더마이어가 브라질의 바닥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콘비벤츠 개념을 가져와 선교신학에 적용한 것은 그 개념이 이미 구약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팔레스타인 정착민과 ‘함께 사는’ 이주자 아브라함의 삶이 제시된다.

또한 신약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니”(요1:14)말씀에서 순더마이어는 ‘함께 하는 삶’ 콘비벤츠의 원리를 발견하며, ‘함께 하는 삶’이 특징이 되고 있는 예수의 삶을 잔치와 연결시키고, 그 잔치에로 초대가 바로 선교라고 말한다.

또한 오이쿠메네2에큐메니칼이란 말은 희랍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온 말로서, 그 뜻은 하나님의 ‘집(Oikos)’에 사는 모든 존재들’을 의미한다. 인간의 타락 후 깨어진 하나님의 한 세계, 한 가족을 회복이 곧 에큐메니칼 운동이 지향하는 것이다. 실존 기본구조로서의 콘비벤츠를 말하고 있는 저자는, 모든 존재들의 ‘공생symbiose’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와 생명의 축제를 그 안에서 발견한다. 이런 콘비벤츠의 개념은 우리의 “두레”를 떠오르게도 한다.

저자가 여기에서 “함께 배우고, 가지고 있는 것들로 서로 돕고, 성만찬을 통해 부활의 잔치를 벌이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표상을 발견하려고 한 것은 콘비벤츠의 연대적 나눔의 삶과 잔치 때문이다.

선교는 영원한 잔치에로 초대이며, 그 잔치는 주변부사람들, 가난한 자들과 연대적 나눔과 배움이 구체화되는 자리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타인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하는”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잔치는 공동체적 행사로서 하나님과 함께 즐길 영원한 안식에 대한 동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선교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몇 가지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세계의 여러 문화들과의 만남에서 기존의 잔치를 받아들였고, 이것을 기독교 축제일과 결합시켜 여기에 상징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그리스도인들은 동의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잔치는 각 문화와 복음과의 불연속성 안에 있는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콘비벤츠가 기독교 사회 밖에서 가져온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삶’으로서 콘비벤츠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신학적 지평의 융합이 기독교 문화의 틀을 흔들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유형으로서 콘비벤츠 개념이 선교신학에 기여하는 바는 그것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고, 종말에 우리가 누려야할 ‘함께 함’의 모형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실존의 상황에서 콘비벤츠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을 위해서’라는 희생과 헌신의 익숙해 있는 우리를 ‘…와 함께 하는’이라는 말에 다시 주목하도록 이끌어준다.

저자가 콘비벤츠의 원리로 삼은 요한복음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구절이나 ‘임마누엘’의 뜻은 기독교가 ‘…을 위한’종교보다는 ‘…와 함께하는’ 진리라는 것에 우리의 선교적 각성을 촉구한다고 볼 수 있다.

‘위한’의 언어적 함의와 ‘함께 함’의 차이는 선교의 목적과 방식에 큰 차이를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비록 오래전에 나왔지만 다시 읽혀져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남미 선교에서 콘비벤츠의 구체적 사례를 들려주는 바가 없이 콘비벤츠를 보편적 선교유형으로 제시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준다.

이 책이 선교적 유형에 또 다른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것은 복음의 보편성과 콘텍스트의 문제를 해석학적으로 선교와 관련시켜 준 것이다. 하나의 예로, 그가 많이 언급하고 있는 한국의 민중 신학에 대해서 정작 내부자가 볼 수 없는 점을 외부자로서 성경적 관점에서 잘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저술될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민중신학은 민중과 함께 하신 예수의 삶과 관련하여 발견되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상황 한계에 머물고 있다. 저자도 그 신학이 새로운 차원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삶의 잔치를 숙고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마 잔치는 한국 민족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한’과 ‘멋’이 있는 한국 민족의 세계 한류 열풍에 따라 유동식 박사의 ‘風流神學’을 제안하는 혹자도 있지만, 이 신학은 이단들이 자기 사상을 정당화하는데 오용될 뿐 아니라 신학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3신천지 인터넷 신문인 ‘뉴스천지’는 유동식박사와 인터뷰를(2012, 2월9일자. SPECIAL- 종교 부분) 통해 그의 ‘풍류신학이’ 마치 신천지 사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세계적 한류 열풍에는 시장경제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 오늘 한국의 자신학화 작업은 경제가 모든 것의 주체가 되고 오히려 사람이 대상화되어버린, ‘갑’과 ‘을’이라는 이 갈등 구조의 콘텍스트에서 성서에 천착(穿鑿)한 선교적 관점으로 고찰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에게 서러운 ‘을’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정한 ‘갑’이 되게 하는 이 상황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인가?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콘텍스트를 억지로 텍스트화 하여 번역 불가능성을 초래하는 이슬람과 같은 종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러면서도 기독교 선교가 타자에 대해 닫힌 담을 헐되, 복음의 훼손이나 왜곡됨이 없이 종말의 잔치를 향해, 그것을 지금 여기서 맛보며 함께 가는 순례의 여정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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