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선교의 성경적 골격

현대선교3 (Current Mission Trends). 발행 : 1993년 3월 1일, 서울:GMF Press. 수록면 : 5-18.

Roger S. Greenway

번역 임태순
한국선교훈련원(GMTC) 총무

이 글은 Roger S. Greenway와 Timothy M. Monsma의 공저인 Cities, Mission’s New Frontier (Baker Book House, 1989)의 일부로서, 출판사와 저자의 허락을 받아 옮겨 실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는 선교사역이 되려면, 그 사역은 완벽한 성경적 기초 위에서 조심스럽게 행해져야 한다. 기독교 사역은 무엇보다도 신학적 신념들의 반영이며, 그 생명력과 형태는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수고가 미약하고 때로는 왜곡되기까지 하는 신학적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를 통한 삶의 변화, 도시생활에서의 이웃관계의 개선, 그리고 생명력 있는 교회들의 설립 등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도시선교학자(urban missiologist)는 성경에 근거하여 현장의 사역자들의 지침이 되는 이정표를 세워야만 한다. 도시선교학자들이 그들의 곁에서 또는 전후에 서서 선지자적이며 참된 사역의 지침들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면, 현장의 사역자들은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급격히 확장되고 있는 도시지역의 도전을 복음적인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이 깨닫기 시작함에 따라, 사역의 시급성에 떠밀려 이 사역의 성경적 기초들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 도시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도움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 그것이 너무나 시급한 것이어서 사역자들은 자기 사역의 신학적인 의미를 숙고해 보지도 않은 채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달려갈 가능성을 안고 있다.

과거의 도시선교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무지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열리고 있는 도시선교의 시대에서는 같은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훌륭한 터를 닦는 지혜로운 건축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뒤에 오는 건축자들이 그 터 위에 집을 짓기를 바랬다.

도시선교를 공부하는 학생 또는 사역자로서 사도들의 뒤를 따르는 우리 역시, 우리 사역의 기초 즉 성경적 계시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 계속 살펴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오직 이 기초 위에서만 최고의 재료를 써서 건축해야 한다.

온전한 도시선교 전략과 활동은 견고한 신학적 기초를 요구한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기도, 성경연구, 우리의 사고영역의 끊임없는 확장, 그리고 솔직하고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

유럽의 경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도시에 대해 신학적인 고찰을 게을리하고 교회와 선교단체 역시 도시선교의 중요성을 간과했을 때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오늘날 유럽 도시의 상황이 바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있다. 유럽의 교회들은 현재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다. 한때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였던 이곳이 오늘날에는 선교지로 변해 버렸다.

어떻게 해서 교회들이 도시를 잃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요인 중의 하나가 학자들이 도시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암스텔담에 살면서 사역하고 있는 유럽학자 C. Henk Koetsier는 주장한다.

여러 해 동안 도시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Koetsier는 유럽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도시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인 분석과 검토가 전혀 없었다. 마치 신학은 현대 도시의 상황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들어 소수의 신학자들만이 도시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신학적 지식으로 가득 찬 상아탑을 박차고 나왔을 뿐이다.

교회들은 도시의 변화하는 상황에 전혀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사회학적으로 볼 때 교회는 도시를 벗어나 교외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고, 신학적으로도 이와 비슷한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들은 도시에 의해 제기된 도전들을 비판적이며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1C. Henk Koetsier, “The Church Situation in European Cities,” Urban Mission 3.3(Jan. 1986):45.

유럽에서 야기되었던 위와 같은 상황들이 북미의 도시들에서 재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으며 머지 않아 세계의 다른 지역까지 파급될 것으로 보인다. 도시로부터 도피하려는 교회와 도시들의 거대한 도전을 외면하는 학자들을 우리는 도처에서 볼 수가 있다. 그나마 약간의 관심이 기울여지는 영역이 있다면 도시선교의 전략과 방법이며 그 기초가 되는 도시의 성경적, 신학적인 본질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이러한 경향에 비추어 먼저 여기서는 도시에 대한 성경의 언급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경적인 관점을 검토해 본 후에 도시사역에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들을 토론해 볼 수 있겠다. 이 두 면이 동시에 조심스럽게 검토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많은 점에서 양자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도시의 의미를 살펴보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비젼, 구속사, 도시를 향한 사역 등에 대해 훨씬 폭녋은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성경에 그려진 도시의 모습

먼저 인류의 타락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도시들과 종말 이후 미래에 존재하게 될 도시를 살펴보자. 그렇게 하고 난 후에 우리가 살면서 사역하고 있는 현존하는 도시들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내가 믿기로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도시를 향한 우리의 선교를 더욱 깊게, 그리고 더욱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실현되지 않은 도시들

실현되지 않은 도시들이란, 인간의 타락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잠재력은 문화, 예술, 공예, 건축, 기술 등에 있어서 악의 영향에 의한 부패 없이, 최고의 단계까지 계발되었을 것이다. 이런 면들은 모든 점에서 조화롭게 나타났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인류에게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 재능을 최고로 발휘한 결과는 바로 제도화된 공동체 생활 즉 도시생활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함께 일하고 각자의 능력과 노력을 공유하며, 하나님의 선하고 풍부한 피조세계의 자원을 가지고 멋진 세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원래 구상하신 세계는 분명히 도시 세계였을 것이다. 인류는 정원에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서 인류의 궁극적 목적지는 도시였다.

더군다나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문화명령은 도시건설을 의미하고 도시건설을 명령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아담은 지구의 자원을 다스리며, 자신의 뜻에 따라 건설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조직하고 다스리도록 되어 있었다.

최초의 핵가족에서 시작하여 확대 가족, 종국에 가서는 전 인류가 한 가족이 되는 죄 없는 공동체로 발전되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그 결과로 도시들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도시들은 거주자에게 순전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놀라운 곳이 되었을 것이며, 죄, 타락, 부조화가 없는 도시의 삶은 인류의 번영과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도시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훌륭한 문화적 중심지들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무한한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인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많은 문화적 업적과 인류의 거룩한 발전을 이뤘을 것이다.

오늘날 타락한 세계에서조차 종종 인간의 지식, 기술, 문화적 업적이 도시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만약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도시는 모든 면에서 현재보다 훨씬 나은 모습 보여주었을 것이다.

만약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결과 인간의 잠재력이 어둡고 어긋난 목적들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면, 도시를 통해 인류가 얼마나 큰 업적들을 남겼을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죄에 물들지 않은 이 도시들은 아마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경배와 찬양이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께 드려졌을 것이다. 완전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면에서 그 거주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신중심적(theocentric)이며 언약적인 도시들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도시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런 도시들은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기사와 또 그 창조하신 세계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통해 위와 같은 도시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류가 타락했고 그 결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왔다.

뒤에 우리는 이 세계의 전개과정과 그 안에서 이뤄진 도시들을 잠시 살펴보겠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나타난 도시들을 살펴보려 한다.

미래의 도시

미래의 도시는 오직 은혜로만 알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 성경은 계시록 21장에서 “거룩한 도성” 또는 “새 예루살렘”으로 불리우는 이 도시를 묘사하고 있다. 이 도시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도시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마치 신랑에게로 나아오는 신부처럼 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도시이다.

이 도시에서의 공동체의 삶은 평화롭고 조화롭다. 눈물도 없고 눈물 흘리게 하는 일도 없다. 사망과 슬픔도 사라졌고, 더 이상의 고통도 없다. 이전 도시를 얼룩지게 했던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졌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완전한 교제 가운데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이 새도시는 성전의 도시(temple city)이다.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곧 그 백성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성경은 그를 죄인들의 구속을 위해 희생된 속죄양으로 묘사한다. 어린 양으로서 그는 이 새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찬양을 받을 권세를 받으셨다.

성경은 다가올 미래의 세계가 도시의 세계(urban world)일 것이라고 가르친다. 구속의 드라마는 동산에서 시작되어 새 예루살렘, 즉 도시에서 끝난다. 천국 시민들은 결국 도시 거주민들이다.

은혜의 구속을 통해 모든 나라, 언어, 종족으로부터 나와 이 새도시의 시민이 된 사람들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으로서 완벽한 조화 속에서 함께 살게 된다. 이 미래의 도시는 이 세상에서는 실현되지 않은 도시들이 누렸을 모든 것을 즐길 것이며, 여기에 다음 한가지를 더할 것이다.

즉 구속의 이야기는 바로 이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새 도시의 시민들은 더이상 죄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받은 죄인들로서 구속의 은혜를 즐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세주와 그의 보혈을 찬송할 것이다 (계 5:9).

현존하는 도시들

소멸되어 가는 과거의 빛나는 기회와 영광스런 미래의 약속 사이에 현재의 도시들이 존재하고 있다. 타락 이후 형성된 도시들은 실현되지 않은 도시의 모습과는 다르다.

죄로 인해 오늘날의 도시들은 인간중심적이며, 폭력적이며, 알력과 탐욕과 갈등으로 가득차 있다. 죄악이 자유롭게 거리와 시장을 활보한다. 죄악이 도시인의 공동생활 가운데 영화롭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도시의 수많은 언약들, 특히 하나님과의 언약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사람이 살만하며, 실제로 매일의 삶이 도시에서 영위되고 있다. 죄가 도시 생활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렇다고 도시가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이방 도시 마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비추고 있으며, 그 위에 그의 형상을 아로새기며, 죄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붙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도시들을 “일반은총(common grace)의”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이것은 그 도시들이 인간에게 구별없이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의 결과로 생존하며 반영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서의 삶은 타락한 도시민의 상태에 적응되어진다. 경찰, 법원, 감옥 등이 존재한다. 법률을 통해 사람들을 보호하며 처벌한다. 도시의 모든 삶의 영역은 죄와 타락의 존재를 반영한 것이다. 사실 도시의 생활은 오직 이러한 방어체계 때문에 극한적인 혼돈으로 떨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Meredith Kline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창세기 4장 1절부터 6장 8절까지의 내용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 Kline은 이 구절들이 어떻게 도시의 본래적 성격을 나타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괴 이후에도 순전히 인류의 유익을 위한 은혜와 자비의 베품으로써 하나님이 도시의 구조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2Meredith Kline, “Kingdom Prologue II,” mimeographied course material, pp. 22-23.

이 세상의 도시들은 하나님의 보존하시고 죄를 방지하시는 은혜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의 성향을 제어하여 인류를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도시를 지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생을 살해한 가인이 자신의 보호를 위해 도시를 건설했다는 점에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도시의 삶이 삶의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공식적인 면에서 보면, 민수기 35장에 나타난 도피성(the cities of refuge)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공된 장소였다.

창세기 4장 15절에서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할 법과 관련하여 그에게 주신 판결문은 도시의 역사적인 시작을 알려주는 서곡이다(17절). 그래서 클라인은 창세기 4장 15절을 실질적인 도시헌장(city charter)이라고 말한다.

도시는 야만으로부터의 도피처, 적들로부터의 은신처, 그리고 창조성과 문화적인 발전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도시는 얼마 안 가서 라멕 이야기(23-24절)에서 나타나듯이 교만과 폭력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3Ibid., p. 25.

이 타락 이후의 도시들은 하나님이 최초에 건설하고자 했던 도시와는 거리가 있다. 즉,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인간의 문화가 제도적으로 통합된 신정적 언약 도시(covenant city)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처럼 거룩한 성전 도시는 언젠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속사의 프로그램을 통해 구현될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이 건설한 도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주어진 “일반은총”의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은 그 내부에 이미 붕괴될 소지를 안고 있다. 역사상에 존재해온 지금의 도시들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부패하고 종국에는 사라질 운명을 갖고 있다.

아마 도시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불안정성은 바로 이러한 미래에 대한 복합적인 불안감과, 그 불완전성과 종국적인 멸망에 대한 무의식적인 자각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타락의 결과 도시에는 근본적인 변화들이 발생했다. 그것은 저주의 가시적인 결과이다. 예를 들면, 모든 도시들은 예전의 영화가 마지막에는 폐허로 변한 그들의 공동묘지들을 갖고 있다.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도시에 이뤄진 또 다른 변화는 모여진 인간의 재능과 자원, 그리고 능력들이 더 이상 세상을 다스리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데 쓰여지지 않는다는데 있다. 도시의 힘은 전쟁을 일으키고 외부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는 힘의 중심이 되어 왔다.

그래서 도시들은 역사적으로 거주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높은 벽과 망대를 세우는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이다.

도시는 더 이상 무역을 위한 지리적인 중심지가 아니며, 지구의 풍요로움과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된 문화적 업적들을 교류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보다는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복지와 구제를 시행하는 행정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때문에 도시에는 시민을 보호하고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경찰서, 법원, 감옥 등이 반드시 존재한다.

한편 도시는 인간의 이기심, 탐욕, 폭력에 의한 모든 부정적 결과들 뿐 아니라, 저주로 인해 야기된 문화발전 노력이 흔히 좌절되는 데 대해서도 대처해야만 한다.4Ibid., p. 26.

그러므로 우리는 “실현되지 않은 도시”와 “현존의 도시” 사이의 약간의 구조적 연속성을 볼 수 있는 반면, 동시에 양자 사이에는 죄와 그 결과 하나님이 인류 전체에게 내리신 저주로 인해 야기된 깊은 불연속성이 존재함을 인식해야 한다. 이 불연속성은 사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된다. 이는 특히 범죄와 폭력의 존재 속에서 그리고 이를 대처하기 위해 도시 거주자들이 만든 여러 제도들 속에서 확인된다.

성경적 도시선교학의 골격

위에서 살펴본 내용들은 도시 선교에서 야기된 많은 문제점들에 접근할 수 있는 대체적인 골격을 제공해 준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들은 사탄의 왕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도시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결과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악의 확산을 막고 피조물들을 축복하시며 심판과 은총 안에서 그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도시의 본질에 관한 위와 같은 성경적 관점의 인식은 다음 몇가지 점에서 유익을 가져다 준다.

  1. 오늘날의 도시들이 일반은총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 도처의 모든 도시가 갖고 있는 신앙적 갈등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오늘날의 도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등을 돌린 자치단체들이다. 도시의 최고의 성취조차도 죄악의 냄새가 배어있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한다.

    성경은 도시 내의 신앙적 갈등을 바벨론과 예루살렘 간의 전쟁으로 묘사한다. 바벨론은 반역적, 탐욕적, 폭력적, 우상숭배적이며 종국에는 멸망하는 인간적인 도시의 대표격이다. 반면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정치가 이루어지는 도시인 것이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평화, 통일 그리고 의를 상징한다.

    예루살렘에서는 우리의 메시야가 왕으로서 통치하는 반면에, 그는 바벨론에서는 거부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참된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으나, 바벨론의 시민들은 악과 결속되어 있다.

    여기에 도시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전쟁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거스틴(Augustine)이 지적했듯이, 어떤 도시이던지 도시 마다 이 두 도시의 면모가 동시에 존재한다. 각 도시마다 바벨론과 예루살렘에 속한 시민들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 두 도시는 서로 다른 주를 섬기며,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화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한 쪽의 주인이 그리스도인 반면, 다른 쪽의 주인은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2. 도시에 살면서 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골격이 없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점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의 본질과 또 도시 사람들이 도시생활을 개선하려고 할 때 끝없이 겪게되는 좌절의 원인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고 있으며, 도시의 중심에 깊이 자리잡은 도덕적 불치병을 이해한다.

    이러한 면들은 카인의 전통이며 라멕 정신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므로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좀더 통찰력 있는 계획과 위대한 지도자, 그리고 좀더 헌신적인 노력만 있다면 도시의 문제는 결국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적인 이상주의의 오류에 결코 빠질 수 없다. 인간의 노력을 통해 완벽한 도시가 건설될 수 있다고 믿는 유토피아적인 생각은, 타락 이후 도시들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즉각 폐기하게 된는 것이다.

    장차 다가올 도시를 열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세상의 일반은총 도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최선의 의도를 통해 이 세상의 도시들이 어느정도 예수의 도시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점진적이건, 일순간에 의해서건 인간이 건설한 현재의 도시들은 결코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 없다. 세상의 도시들은 일시적인 것이며 저주 아래 있다. 미래의 어느날 성경이 약속한 하늘의 도성이 임할 때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도시 사역자들이 이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순진한 이상주의가 도시선교학에서 설 자리가 없는 것은, 그것이 비성경적인데다 자기 살을 깎아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적 관점에 따라 도시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 대하여 좀더 긍정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 포기하기 보다는 도시를 이해하는 입장에 서서 도시를 위한 자신들의 책임을 감당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한 근거를 우리는 예레미야 29장 7절에서 발견한다. 사악한 바벨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 오늘날의 도시들은 건설되고 또 유지된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의 발전 역시 이에 의존한다. 도시 안에서 인간의 마음과 영혼 점령을 위한 강렬한 싸움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시는 기독교 선교와 구속의 드라마에 있어서 핵심적인 무대이다. 이러한 면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도시를 탈출하기보다 오히려 빛과 소금으로서 도시의 구석구석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도시 안에서의 하나님 자녀의 사역은 결코 협소하거나 고립적이어서는 안된다.

    도시의 교회는 도시 삶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 제도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갖고 있다. 교육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시청이나 또는 시장거리에서 예루살렘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도시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가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들은 도시의 복지를 위해 기도하며 선을 도모하고, 악에 대해서 공격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안다. 그들은 도시의 가장 본질적인 싸움은 종교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사역과 증거의 범위를 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타협하지 않는다. 도시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성경적으로 각성된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의 본질을 이해하며 또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제자삼으라는 선교적 명령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도시에 대해 현실적이며 복음적으로 접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시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로 인해 놀라거나 동요되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것들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도시는 그 본질상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결과이며 문화적 발전을 격려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탐욕, 억압, 불경건함과 같은 가인의 유산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가인의 후예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가인의 후예들이 원시적인 에녹으로부터, 폭력적이지만 문화적으로 번성하였던 라멕의 산업 중심지를 거쳐 바벨론과 소돔, 그리고 마침내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계 17:5)인 바벨론의 계보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서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가를 알고 있다. 그들은 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삶과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구조 안에 죄와 악이 역사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또한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인해 도시 내에는 선과 아름다움의 형체가 존재하며, 카인의 정신이 억제되고, 마귀적인 잠재력이 급격하게 확산되지 못하도록 제어되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따라 또 다른 능력이 도시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안다. 그는 악한 영의 역사를 제한하며 도시 안에 다른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다. 성령은 거리에서 예수의 메세지가 선포되는 것을 염원하는 것이다.

도시선교에의 부름

성경에서 도시선교를 위한 부르심은 선지자 요나의 경우가 처음인데,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신 것이다(욘 1:2, 3:2). 신약의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이 명령을 자신들이 살고 있던 도시들에 적용하였다. 다음 장에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선교의 측면들을 검토할 때 다시 다룰 것이지만, 여기서는 도시를 위한 사도로 최초의 부르심을 받은 요나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니느웨는 “큰 성읍”(욘 1:2)이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아마도 풍성히 나타났던 도시였을 것이다. 거대한 도시였을 뿐 아니라 제국의 수도이며 아름다운 도성으로 유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상 존재했던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말한다.

군사적으로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고고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이 성의 외벽은 60마일에 이르며 내벽은 그 높이가 100피트나 되고, 성벽은 말이 끄는 전차 세 열이 정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왕궁을 짓기 위해 만명의 노예가 12년에 걸쳐 노역했으며, 공원과 공공건물들은 당대의 유명한 건축물들이었다고 한다.

니느웨는 1500년간 존속했으며 짧은 기간에 완성된 현대 도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위대한 도성”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니느웨는 고대와 현대를 통해서 나타난 도시들의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도시이다. 이 도시는 문화적 발전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억압과 폭력, 부정의 표상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지적하신 니느웨의 사악함이야말로 이 도시의 근본적인 문제였으며, 그것이 요나의 선교가 필요한 이유였다(1:2).

그 아름다움과 권력에도 불구하고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었다. 그들의 신들은 우상이었으며, 이들이 누리고 있던 경제적, 정치적인 풍요는 군사적 정복, 약한 민족들의 착취, 그리고 노예들에 의해 이뤄졌다.

나훔 선지자는 이 도시를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간음하는 도시” (나훔 3:4)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모든 형태의 악과 음란이 행해졌으며 예술적인 성취조차도 추잡함과 우상숭배로 더럽혀졌다. 이 도시가 행한 약탈과 폭력 때문에 나훔이 니느웨를 “피의 성”(3:1)이라 부른 것은 적절했다.

하나님은 그 도시가 어떠했는지를 잘 아셨고 때문에 그 사악함에 진노하셨다. 그 도시의 죄악은 시민 각 개인의 범죄이기도 했는데 이는 그들 모두가 이 도시의 범죄에 동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도시의 범죄는 집단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들의 생활양식, 문화, 성취들 역시 사악함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인과 라멕의 유산이 이 도시에 분명하게 나타났다. 니느웨 시민의 삶은 모든 면이 전반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들의 유일한 해결책은 회개하는 것 뿐이었다.

도시선교에 있어서 요나서의 중요성은 여러 각도에서 연구될 수 있다.5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선교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Roger S. Greenway, Apostles to the City: Biblical Strategies for Urban Missions(Grand Rapids: Baker, 1978), pp. 15-28.

선교전략가들은 우리가 잘 아는 하나의 패턴를 발견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선지자를 부르고, 그는 도시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그 결과 도시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선교전략이란 관점에서 볼 때 요나는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모형으로서 간주된다.

신학자들은 요나서를 통해 선교의 주도자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는다. 요나서는 요나에 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가 그 부르심에 순종할 때까지 추적한다. 요나의 불순종과 잘못된 동기에도 불구하고 이 사악한 도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이 사건 진행을 주도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 기사는 하나님의 선교이지 요나의 선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구원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선지자로 하여금 행동하게 했고 또 도시를 회개시키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나의 선교가, 너무나 사악해서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도시들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회개와 구원의 메세지를 선포할 당신의 백성을 보내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문제가 많이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니느웨를 사랑하셨으며 이 도시의 거리에서 자신의 메시지가 선포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요나의 임무, 더 나아가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임무는, 권력과 악의 중심지인 도시에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는 것이며, 이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의 투쟁에 동참하는 것이다.

요나의 이야기와 니느웨에서 있었던 사건은 두고두고 분석하고 묵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수십 세기 전 니느웨에서 있었던 도시선교의 사건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도시에서도 다시 재현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지금도 도시선교의 본질, 도시민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이들에게 그의 말씀이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열망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요나의 이야기는 선교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의 도시를 인식하기 거절하는 도시 사람들의 반역적인 정신에 대해서도 우리의 주의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만약 요나가 이사야 42:1-9 말씀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명하신 대로 율법을 가르치고, 공의를 세우며, 이방의 빛으로서 섬기는 일을 니느웨에서 계속 사역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를 상상해 보라.

만약 요나가 고국의 동료 선지자들에게 전갈을 보내 니느웨에서 일어난 큰 부흥을 알리고 이 도시를 양육하기 위한 사역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새로운 날이 되었을 것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마음, 특히 니느웨와 같은 사악한 도시들을 포함한 온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향한 메신저 국가로서의 택하심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에서의 사역에 대한 거부감에 젖어 있었다. 선교라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실패는, 요나에게서 보여진 불순종, 온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니느웨와 같은 세상의 도시들에 대한 예루살렘 시민의 책임 등을 고집스럽게 거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 작은 책, 그리고 이 책을 포함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한 이스라엘 신학의 오류를 지적해주기 위한 것이다. 한편 이 책의 교훈은 고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선교를 교정하고, 점검하기 위해서도 주어졌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요나는 사역 후 도시를 떠나버렸고 니느웨의 회개는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이 도시는 파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예수는 니느웨 회개의 진실성을 이렇게 말씀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눅 11:32).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래로 도시와 도시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니느웨의 회개는 도시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성령이 역사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니느웨의 사건이 신앙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 왕국을 위한 위대한 운동의 시발점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의 무산된 기회로 기록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니느웨의 이슈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남아 있다. 전세계적으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복음화를 기다리고 있는 현대의 니느웨들을 향해 이 절호의 기회를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요나처럼 좀더 편한 다른 지역으로 도피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또한 만약 그들이 도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면 그들의 메시지는 얼마나 폭이 넓어야 할 것인가? 상점과 거리, 그리고 시청 등 모든 영역에서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도처에 잠복해 있는 도시의 사악함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요나서의 마지막 구절은 요나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하지 못한 실패라는 점에서 슬픈 장면이지만, 한편으로 이 구절은 도시선교의 신학과 골격이라는 점에서는 놀라운 말씀이다.

이 구절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손수 그 도시의 인구를 헤아리고 더 나아가서 도시의 어린아이와 짐승들까지 관심을 보이는 위대한 인구통계학자이심을 보여준다. 우상을 숭배하고, 잔혹하며, 탐욕스런 도시 니느웨였지만 하나님의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선교의 모든 길이와 넓이는 이 성경의 계시 안에 함축되어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선교사업의 주도자이면서 동시에 지휘자이시다. 그는 인류의 복지를 위해 자연을 다스리고 창조질서를 주관한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사는 특별히 사람들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들의 구속을 위해 아들을 보내셨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선지자들을 도시로 보내시는 것이다. 끝.

내용 목차

주해

  • 1. C. Henk Koetsier, “The Church Situation in European Cities,” Urban Mission 3.3(Jan. 1986):45.
  • 2. Meredith Kline, “Kingdom Prologue II,” mimeographied course material, pp. 22-23.
  • 3. Ibid., p. 25.
  • 4. Ibid., p. 26.
  • 5.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선교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Roger S. Greenway, Apostles to the City: Biblical Strategies for Urban Missions(Grand Rapids: Baker, 1978), pp.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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