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관점에서 본 도시 선교

현대선교3 (Current Mission Trends). 발행 : 1993년 3월 1일, 서울:GMF Press. 수록면 : 20-36.

노봉린
아세아연합신학원(ACTS) 교수, 아세아신학협회(ATA) 총무,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신학분과 총무.

이 글은 Urban Ministry in Asia (Bong Rin Ro ed., ATA, 1989)에 실린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우리말로 옮겨 실은 것이다.

서론

인도에서는 매일 10,000 명의 시골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상업도시인 봄베이로 몰려들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인도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근자에 와서 도시에 관한 연구는 일반 학자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학자들의 관심 분야가 되었다. 1981년과 1984년 사이에 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가 독자적으로 개최한 복음화회의를 살펴보더라도, 카이로, 멕시코시티, 봄베이, 벨그라드, 코펜하겐 등의 도시에서 60회 이상 개최된 것으로 집계된다.1Raymond J. Bakke, “Evangelization of the World’s Cities,” An Urban World: Churches Face the Future, ed. Larry L. Rose and C. Kirt Hadaway(Nashville: Broadman Press, 1984), p. 89

1986년 3월 14-17일 동안 시카고의 무디성경신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무디성경신학교,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위튼대학/대학원(Wheaton College and Graduate School)의 공동 주최로 세계적 규모의 도시들(world class cities)의 복음화를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한편 어바나학생선교대회(Urbana Student Missions Convention)도 1987년 대회와 1990년 대회에서 도시선교에 촛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필요에 부응하여 아시아신학협회(ATA)가 “아세아의 도시 사역을 위한 신학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제8회 아시아신학회의를 갖게 된 것도 놀랄 일이 못된다.

도시 사역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새로운 분야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이 너무나 빈곤하다. 더군다나 이 주제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란 광대한 영역이기 때문에, 필자는 아시아 교회에 적합한 두 가지 분야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도시사역이 초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되겠다.

둘째로, 아시아교회가 특별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상황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왔는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두 가지인데, 아세아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교회가 어떻게 도시 상황에 대처해왔는가를 보게 하면서, 오늘날 아시아 도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신학교와 선교훈련의 교과과정에 도시 사역을 강조하도록 돕는 것이다.

I. 도시 사역의 역사적 발전

골든게이트 침례교신학원의 선교학 교수인 Francis M. Dubose 박사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셨으며, 나사렛이라는 도시에서 성장했으며,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고 부활하셨다고 말하였다. 주님은 도시를 사랑하셔서 도시를 위해 우셨으며(눅 9:35),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시와 마을로 다니셨다(마 9:35-36).2Ervin E. Hastey, “Reaching the Cities First: A Biblical Model of World Evangelization,” An Urban World: Churches Face the Future, ed. Rose and Hadaway, p. 148.

사도 바울의 사역은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그리이스의 주요 도시와 로마라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An Urban World: Churches Face the Future라는 책에 실린 “도시를 먼저 복음화하자: 성경적 세계복음화의 모델”이라는 Ervin E. Hastey의 글은 1세기의 사도들의 도시 사역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3Hastey, pp. 147-165.

A. 초대교회(A. D. 100-450년)

초대교회의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주요 도시로 급속도로 전파되어, 서기 180년까지는 로마제국의 모든 지방까지 번졌다. 서기 200년경에는 초대교회의 건물들이 도시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회의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World Christian Encyclopedia의 편저자인 David B. Barrett 박사는 World Class Cities and World Evangelization라는 책자에서 광범위한 통계와 역사적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 가운데는 도시에 튼튼한 그리스도인의 근거지를 세운 교부들도 많이 있었다. 「이단에 대하여」(Against Heresies)라는 책을 쓴 이레니우스(Irenaeus, A. D. 120-202)는 서기 175년에 리용의 주교가 되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마니교에 대항해서 싸웠으며, 249년에 와서 7명의 선교사 주교들이 로마의 코넬리우스에 의해 토르, 아를르, 나르본, 톨로스, 파리, 리모게 그리고 골지방의 클레몬트 등의 도시로 보내어졌다.

251년경 로마에는 전체 인구 900,000명 중 5%에 달하는 45,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46명의 장로(presbyter)가 있었다. 이태리의 남부 도시에는 100개 이상의 주교직이 있었다.4David B. Barrett, World Class Cities and World Evangelizatiion(Birmingham, Alabama: New Hope, 1986), p. 40.

동쪽으로 가보면,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지대(현재의 우르파)의 에데사왕인 아브갈 4세가 179년에 기독교인으로서 첫 통치자가 되었고, 225년에는 에데사에서 기독교가 처음으로 도시국가의 국교가 되어서 동시리아를 위한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5Ibid.

북아프리카에서는, 2세기부터 5세기까지 기독교가 주요 도시에 전파되었고, 북아프리카교회는 초대교회사에서 가장 강한 복음의 증거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터툴리안(150-258), 카르타고의 시프리안 주교(248-25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몬트(155-220),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185-254), 히포의 성 어거스틴(354-430) 등의 사람들은 기독교 사역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14년간에 걸쳐 「신국」(De Civitate Dei)을 저술한 성어거스틴은 로마제국의 몰락을 묘사하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도시의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였다.6Harvie M. Conn, “The Kingdom of God and the City of Man,” Discipling the City, ed. Roger S. Greenwa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4), pp. 14-15. See Raymond J. Bakke, The Urban Christian(Bromley, Kent:MARC Europe, 1987), pp. 85-87.

카사리아의 성 바실(329-379),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329?-389), 니사의 그레고리(330-395) 등과 같은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의 도시들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330년에 콘스탄틴1세 황제에 의해 수도가 된 콘스탄틴(현재의 이스탄불)은 제국의 동부에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존 크리소스톰(398-403)과 같은 뛰어난 설교가들은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했다. 안디옥에서는 380년경에 200,000 인구의 50% 정도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한다.7Barrett, p. 41.

대주교 제도는 초대교회 때 개발되었다. 주교는 도시의 영적 지도자였는데, 그 도시의 교구 안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소속되었다. 한 도시에 한 교구가 존재한다는 원칙이 입법화되었고, 찰세돈공회(the Council of Chalcedon)는 심지어 어떤 도시가 도시로 인정되기 전에라도 교구가 설립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8Hastey, p. 39. 그래서 초대교회의 기독교는 도시 중심적이었다.

시골지역의 교회는 3세기에 가서야 이태리 북부에서 시작된다. 4세기와 5세기에 와서 프랑스에 시골교회가 늘어나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기독교가 전 유럽에 널리 펴져 있을 때였다.9Ibid.

B. 중세 교회(450-1350)

서기 476년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교회는 유럽에서 강하게 되었지만, 로마를 비롯한 도시들은 북유럽과 중부유럽에서 쳐들어온 야만인들(비시곹, 반달, 오스트로곹 등)의 침략으로 쇠퇴하였다. 제국의 권세는 도시의 시민들을 보호할 힘도 없을 만큼 약화되었으며, 도시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의 처음 500년은 암흑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특별히 서기 900-1150년 사이에 중앙 권력의 약화와 함께 봉건제도가 개발되었다. 봉건제도 하에서는 거의 모든 교구에는 시골 인구가 포함되었으며, 시가지의 숫자나 그 인구도 많지 않았다. 성이나 성벽 도시는 영주의 군대가 지켜서 농부들과 도회지 사람들을 위해 치안유지를 해주었다. 그 결과 기존의 교회 구조는 봉건제도의 압력 때문에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중세 동안에 수도원 제도라는 새로운 종교적 운동이 발전되었다. 529년 몬테카시노에서 베네딕트 칙령이 세워지면서 수도원 제도가 중세교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종교적 공동체였던 수도원은 “새로운 종류의 폴리스”10Lewis Mumford, The City in History(N.Y.: Harcourt Brace Jovanvich, 1961), pp. 246-247. See Hastey, p. 40.인데 초대교회의 신정정치의 기능 대신에 고전적인 도시(classical cities)와 중세 도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도시의 이상적인 목적이 정리되고, 활성화되고, 궁극적으로 새롭게 된 것은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절제, 질서, 규칙성, 정직성, 내적 훈련 등의 실제적인 덕목들이 확립된 것도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나중에 중세 도시와 중세 후기 자본주의에 물려져서 시계, 회계 장부, 정해진 일정 등의 발명과 사업적 실행으로 나타난 것이다.11De Civitate Dei, XIV, 28, quoted in A.H. Armstrong, ed.,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Greek and Early Medieval Philosophy(London: Cambridge Univ. Press, 1967), p. 414. See Conn, pp. 15, 16.

그래서 수도원은 천상의 도시의 형상과 로마의 도시들의 관계를 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회가 도시로부터 수도원으로 후퇴함에 따라 교회는 외적인 사역보다는 더 내부 지향적으로 되었으며, 무질서한 중세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영적인 힘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 결과 교회가 르네상스기의 도시 발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12Conn, p. 40.

11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도시가 다시금 발전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새로운 거룩한 로마 제국(962-1806)이 일어나면서 제국과 로마 교황의 권위 사이의 충돌이 심화된다.

1054년에 동방정교와 로마 카톨릭교회 사이에 영원한 분리가 있게 된다. 서부에서의 교황의 권위는 1077년에 카노사에서 거룩한 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4세를 파면했던 그레고리 7세(1075-1085)를 통해서 급격히 높아졌다. 교황의 권위는 교황 이너선트 3세(1195-1216)의 재임 기간 동안 극에 달했다.

교황의 축복을 받으면서, 유럽의 군주들은 성지를 되찾기 위해서 무슬림 투르크족에 대항해서 8번에 걸쳐 십자군 전쟁(1096-1270)을 일으켰다.

봉건제도가 쇠퇴하면서 12세기는 중상주의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된다. 12세기에는 새로운 상업적인 산업계층이 일어나면서 길드, 동업조합, 회사, 노동조합 등이 발전되었다. 13세기까지는 신용제도가 도시에 확립되어서, 그 결과 베니스와 제노아는 이태리에서 영향력있는 상업도시가 되었다.

초기 스콜라 철학이 11세기 중반에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이태리에서 살레노와 볼로그나 같은 도시들(1150)과 파리(1200), 옥스포드(1200?) 등지에 세워졌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 서구에 소개되었다(1033-1109).13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Zondervan, 1981), pp. 240-241.

캔터베리의 성 안셀름(1033-1308), 윌리엄 오크남(1280-1349)와 다른 학자들은 이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중세 후기의 도시들은 도시화의 진행을 촉진하는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미니칸, 프란시스칸, 어거스티니안, 카르멜리트와 같은 수도사들의 새로운 규율들이 12-13세기에 걸쳐서 도시와 도시 외곽 지역에서 발전되었다.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홀로 기도와 명상에만 전념하였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이 수도사들은 도시에 있는 병원과 구빈원(almshouse)에서 일하였다.

동방교회 안에서는 네스토리안 교회가 시리아에 거점을 두고 성장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서기 1000년까지 시리아 동부의 네스토리안 교회는 아시아 지역에 250개의 관구에 1천 2백만의 교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관구들은 아랍 칼리파트 관할구역 내의 15개 도시권과 인도와 중국의 5개 도시권 내에 있는 도시들에서 조직되었다.

그리이스정교의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지중해 동부의 도시들에 있는 624개의 관구들을 관리했다. 1150년에 시리아 서부 교회는 20개의 대교구와 도시에 근거를 둔 103개의 교구를 가지고 있었다.14Barrett, p. 41.

C. 르네상스(1350-1650)

14세기초부터 교황의 권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유럽에는 도시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난다.

하비 칸(Harvie Conn)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왕국과 인간의 도시」(Kingdom of God/City of Man)에서 오크함의 명목주의(the nominalism of Ockham)가 긍정주의와 경험주의의 개념을 강조했으며, 기독교 신앙을 확실성보다는 가능성으로 이끌었다고 하였다. 그 결과 인본주의의 경향은 르네상스기 동안 세속사회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까지 자라게 되었다.15Conn, pp. 18-19.

새로운 과학적인 발견들이 인간의 야망을 고취시켰다. 화약이 1350년부터 쓰였으며, 1450년에 구텐버거의 활자본으로 처음으로 책이 인쇄되었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태양중심설”, 갈릴레오(1564-1642)의 망원경 사용과 요한 케플러의 지동설이 교회의 전통적인 과학관에 도전하였다.

이 시기의 화폐 경제는 은행제도를 창안했고, 자본주의 경제의 발흥으로 이어졌다. 15세기 후엽부터 지리상의 대발견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콜롬부스가 1492년에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1472년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갔다.

이 시기에 이은 450년간의 서구 식민주의 기간을 가리켜 인도의 역사학자 K. M. Panikkar는 그의 저서 「아시아와 서구의 지배」(Asia and Western Dominance)에서 이 시기를 “마스코 다 가마의 시대”(Vasco da Gama Epoch; 1497-1945)라고 불렀다.16K. M. Panikkar, Asia and Western Dominance(London: George Allen and Urwin LTD., 1961), p. 13.

더우기 르네상스의 예술, 건축, 그리고 아름다운 성당들은 종교의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해석을 낳았으며 결국 도시의 발달로 이어졌다.

D. 종교개혁 시대(1517-1600)

“신정 도시에서 대도시”(theopolis to megapolis)17Harvie Conn은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도시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네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대의 도시를 위해서는 ‘코스모폴리스’(Cosmopolis), 중 세 도시를 위해서는 ‘데오폴리스’(theopolis),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도시들을 위해서는 ‘메가폴리스’(megapolis), 현대도시들을 위해서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See Conn, pp. 10, 13, 26, 28.로의 급격한 변천, 즉 콘스탄틴 시대 때부터 전해져 온 교회-국가의 지원을 받는 도시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대대적인 도시발달로 바뀌는 가운데 종교개혁은 도시들의 지속적인 발달을 촉진하였다.

무엇보다도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만민사제설 등과 같은 종교개혁의 교리들은 중세교회의 권위를 극소화하고 세속 통치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anum)에 대한 중세적인 개념, 즉 그리스도인의 사회 안에 교회와 국가가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둘이 하나님의 도구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해야 한다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를 성경의 권위로 이끌려고 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사용되도록 노력했다. 중세적인 ‘그리스도의 몸’의 전통 속에서 자란 루터와 칼빈 모두 재세례파들이 주장한 것처럼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하지는 않았다.

루터는 그의 시편 101편 주석에서 구별되고 특이한 국가의 특성과 임무에 대해 강조했는데, 그는 국가를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것으로 보면서도 교회의 세속적 기관으로 보지는 않았다. 이 두 권위를 분리한다는 것이 루터에게는 문제가 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루터의 이 두 권위의 분리에 대해서, 즉 그가 교회와 국가에 대한 중세적인 개념에 더 호의적이지 않았느냐에 대한 논점에 대해 다소간 해석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죄로 깊이 물든 사회에 그리스도의 도덕과 영적 축복을 가져다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18Bong Rin Ro, “The Church and State in Calvin,”(unpublished S.T.M. thesis, Concordia Lutheran Seminary, St. Louis, 1967), pp. 20-21.

루터보다 26살 아래였으며, 루터를 “너무나 존경하는 아버지”(much-respected father)라고 불렀던 칼빈은 두개의 다른 세계를 구분하였고, 관리의 종교문제에 대한 개입과 교회의 세속 정부에 대한 권위의 주장을 모두 거절하였다.

두 권력을 분리한다는 것과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칼빈은 교회와 국가가 같은 주(主)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의 바탕 위에서 교회와 국가의 밀접한 상호 관계를 믿기도 했다. 20년 동안 이 문제로 씨름한 후에, 칼빈은 마침내 제네바라는 도시에 신정적인 “그리스도인의 국가”를 세웠다(1555-1564).19Ibid., pp. 52-56.

종교개혁이 도시화의 진행에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거룩한 로마제국의 65개 도시 중 50개 도시가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종교개혁의 대세를 영구히 혹은 한시적으로 인정하였다. 독일에서 누른베르크, 스트라스부르크, 루벡, 아우그스부르크, 울름 등 인구 25,000명 이상의 대도시를 포함해서 인구 1000명 이상을 가진 200개의 중,소 도시들이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20Conn, p. 21.

E. 현대 교회(1600-)

1. 산업혁명과 급격한 도시화

17세기, 18세기에 걸친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함께 산업혁명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 침투하게 되었다. 아이작 뉴톤의 중력의 법칙(1678), 리차드 아크라이트의 방적기(1768),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1769), 에드문드 카트라이트의 방직기(1784), 제임스 하그리이브의 다축방적기(1770), 그리고 증기 기관과 석탄 연료(1775) 등이 영국에서 제1차 산업혁명(1760-1830)을 일으켰다.

이 산업혁명은 나중에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났으며, 19세기 중반에는 마침내는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아담 스미쓰는 1776년에 자유기업의 방임주의(laissez-faire)를 고무하기 위해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을 출판하였다.

18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 시대는 전통적인 성경적 신앙의 근거를 더욱더 훼손하였다. 차알스 다윈의 「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1859)과 칼 맑스의 「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 1848)와 함께 인간은 사회, 경제적인 환경에 의해 조건지워진 동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결과 중의 하나는 도시인구의 급격한 증가이다.

배럿의 보고에 의하면, 런던의 인구는 861,000(1800)에서 2,320,000(1850), 4,200,000(1875), 6,480,000(1900)으로 늘어났으며, 파리는 547,000(1800), 1,314,000(1850)21Barrett, pp. 42-43., 2,250,000(1875), 3,330,000(1900)으로 늘어났다.

뉴욕의 인구는 682,000(1850), 1,900,000(1875), 4,242,000(1900)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직장과 행복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하비 칸은, 중세기의 질문은 “나는 과연 선한 사람인가?”(Am I a good man?)이었는데, 현대인의 질문은 “나는 과연 행복한 사람인가?”(Am I a happy man?)라고 말한 바 있다.22Conn, p. 27.

1800년에는 인구 1백만 이상의 도시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1900년에는 11개의 도시가 11백만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도시들은 동경과 캘커타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럽과 아메리카에 있는 도시들이었다.

1980년에 와서 235개의 도시가 인구 1백만 이상이었는데, 서기 2000년에 가서는 인구 1백만 이상의 도시는 439개가 될 것이며, 그중 25개 도시는 인구가 1천1백만 이상이 될 것이다. 세계의 25대도시들 중 22개 도시가 제3세계의 도시들일 것이다. 그래서 서기 2000년에는 인구 1백만 이상의 도시는 2,200개가 될 것이다.23Ibid., p. 48. See Barrett, p. 49.

과밀한 도시는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 슬럼가, 빈곤, 매춘, 교통 혼잡, 공해 등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산업 도시들의 끔찍한 조건들은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인간의 필요에 대해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였다.

2. 도시 문제에 대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의 반응

18세기와 19세기 영국과 유럽과 아메리카의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의 갈급한 필요를 모르지는 않았다.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많은 기독교 사회사업 기관들이 세워졌다. 한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으로 어느 집없는 아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토마스 구드리 목사의 동상이 스코틀랜드에 서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18세기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영국에서 사회 개혁을 주도했던 부유한 그리스도인 정치가와 사업가들의 모임인 클라팜 당파(the Clapham Sect)를 만들었다. 헨리 벤(Henry Venn)은 클라팜 당파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했고, 그의 아들 존 벤(John Venn)은 ‘교회선교사협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를 창설했으며, 노예제도의 폐지와 감옥 개혁의 시조가 되었다.24William N. Kerr, “Historical Evangelical Involvement in the City,” The Urban Mission, ed. Craig Ellison(Grand Rapids: Eerdmans, 1974), p. 29.

영국에서 빈곤이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18세기 말엽에 뛰어난 정치가인 윌리엄 윌버포스경(Lord William Wilberforce)은 1796년에 “빈자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고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설정했으며, 1797년에 클라팜 당파의 강령을 제정했고, 1807년에는 노예 거래의 폐지를 추진하였다.25Ibid., p. 30

샤프테스베리(Lord Shartesbury)경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깊은 사회적 관심에서 주거, 보건, 위생, 학교, 노동법 입법 등의 노력을 하면서 근로자들의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845년에 그는 런던의 성 죠지 하노버 광장에 사는 가난한 자들의 주거 실태에 대해 의회에 보고했는데, 그곳에는 929 세대가 단칸방에 살았으며, 5가정이 단칸방에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모범적인 근로자 숙소가 세워졌다.26Ibid., pp. 32-33.

독일의 라우헤 하우스(the Rauhe Haus)는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살았던 함부르크의 루터교 경건주의자인 요한 하인리히 비헨 목사(1808-1881)에 의해 세워진 유명한 기독교 사회사업 기관이다. 독일에서만도 라우헤 하우스의 지부가 250개가 있었으며, 라우헤 하우스는 마침내 1848년에 내륙선교회(Die Innere Mission)를 시작했다.

미국에 발행되는 「Urban Mission」의 전임 편집장인 로저 그린웨이(Roger Greenway)는 미국역사상 많은 기독교 사회사업 기관들의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었던 1870-1910년 사이의 중요한 기간을 지적한다.

미국기독교위원회(the American Christian Commission)가 1865년에 제임스 예트맨(James E. Yeatman)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위원회는 대표적인 35개 도시에서의 필요들을 보고했으며, 도시 사역을 위한 개신교 교회들을 위한 응집력있는 전략을 제안하기도 했다.27Roger S. Greenway, “History of Evangelizing World Class Cities,” unpublished paper at the Trinary Consulatatiion on Evangelizing World Class Cities in Chicago, March 14-17, 1986, p. 16.

1878년 런던에서 윌리엄 부쓰(William Booth)에 의해 설립된 구세군은 영국과 미국에서 폭넓은 빈민가 사역을 했다.

D. L. 무디는 특별히 도시 빈민들을 위해 시카고의 일리노이가에 초라한 교회 건물을 지어서 누구나 교회에 올 수 있도록 초청하였다. 무디는 현관문에 “낯선 자와 가난한 자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집에 오는 것을 환영하는 하며, 좌석은 무료입니다”라는 안내판을 붙였다.28Ibid., p. 21.

1876년에 제리 맥올리(Jerry McAuley)는 월스트리트선교회(the Wall Street Mission)를 시작했으며, 1882년에는 뉴욕시의 빈민가에 그레몬선교회(the Gremorne Mission)을 설립했다. 1872년과 1892년 사이에 100개 이상의 구제 선교기관들이 미국과 해외에 설립되었다.29Ibid., p. 22.

3. 사회복음의 발생(1900-1920)과 복음적인 대응

복음의 사회적 의미는 호레이스 부쉬넬, J.W.H. 스툭켄버거를 비롯한 사람들의 저작들 가운데서 이미 간파되었지만, 20세기를 위해 사회 복음의 의미를 일반화시킨 사람은 「기독교와 사회의 위기」(Christianity and Social Crisis; 1907)와 「사회 복음의 신학」(A Theology of the Social Gospel; 1918) 등의 책을 쓴 로체스터 신학원의 월터 라우쉔부쉬(Rauschenbusch; 1861-1918)이다.

그는 칸트, 헤겔, 다윈, 칼 맑스, 플라이더러, 리츨, 듀이 등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인간사에 있어서 점진적이 사랑의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위에 이루고자 하였다(「사회 복음의 신학」(A Theology of the Social Gospel, p. 142).30J.L. Neve,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2(Philadelphia: The Muhlenberg Press, 1946), pp. 316-318, 324-325.

19세기와 20세기에 신학교와 지역교회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복음은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J. 그레샴 마헨(Gresham Machen), A.T. 로버슨(Robertson) 등 다른 많은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사회복음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싸웠다. 로저 그린웨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사회복음의 주창자들 사이의 논쟁은 도시선교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한쪽은 사회적 조건의 개선을 위한 긍정적인 제안은 내놓았지만, 성경의 영혼구원의 메시지를 결여하고 있다. 다른 쪽은 악한 사회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도 하지 않고, 변화도 추구하지 않으며 내버려두는 불완전한 형태의 복음을 전하였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는 이 논쟁에 의해 야기된 딜렘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두려움과 의심에 빠져있다. 결과적으로, 도시에 대한 개신교 선교는 80년 전이나 90년 전의 상태에서 크게 나아진 바가 없다.31Greenway, pp. 23-24.

4. 도시를 위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변화

하비 칸은 도시에서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려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사회의(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sil)에서 비롯되어 1960년대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았다.

18세기 중엽의 계몽주의 시대부터 일어나서 오늘날의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의 신학에 이르기까지(슐라이어막허-리츨-하르낙-발트-불트만-해방신학) 자유주의 신학은 현재의 에큐메니칼 도시선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32Conn, pp. 47-51.

인구폭발, 대도시 숫자의 급격한 증가, 비인간적인 삶의 조건, 기타 새로운 도시 문제의 대두 등이 모두 직접적으로 선교신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32년 윌리엄 E. 호킹(William E. Hocking) 박사는 「선교의 재정립」(Rethinking Missions)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개종시켜 그리스도께로 데려오기보다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데까지 이르도록 선교신학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33Stephen Nei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Baltimore Maryland: Penguin Books, 1971), p. 456.

코네티컷의 하트포드 소재 해외사역연구원(the Overseas Ministries Study Center)의 책임자인 제럴드 앤더슨(Gerald Anderson)박사는, 칸이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선교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논쟁은 에딘버르에서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 하는 전략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무엇 때문에 선교하느냐?(1928년 예루살렘 회의), 어디에서부터 선교할 것이냐?(1938년 마드라스), 어디에서 선교할 것인가?(1947년 위트비), 왜 선교하느냐(1952년 윌링겐) 등으로 옮겨갔다. 1957년과 1958년의 가나에서의 회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급진적으로 기독교 선교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34Conn, p. 52.

이 세상에서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해온 것은 종종 하나님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강조되었지만, 도시와 시골에서의 빈곤과 인권 문제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을 재설정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도시사역 부서가 있어서 아시아를 비롯해서 대륙별로 지역 사무소들을 가지고 있다.

근래에 도시사역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급속도록 일어나고 있다.

로잔세계복음화협의회(LCWE: the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는 1980년 태국의 파타야에서의 회의의 결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 증거」(Christian Witness to the Urban Poor)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로잔위원회의 도시사역 조정자인 레이몬드 박커(Raymond Bakke) 박사는 도시에 관한 세미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영국의 도시선교를 위한 복음주의자들의 연합(ECUM:the Evangelical Coalition for Urban Mission)도 도시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도시선교 프로그램은 서구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점점더 많은 신학원에 개설되고 있다.

복음적인 해외선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도시사역을 중시하고 있다. 미래에는 사단의 영향력에 대항해서 싸우는 교회와 사역자의 영적 전쟁이 도시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II. 아시아에서의 도시선교의 역사적 발전

“현대 문명은 근원적으로 유럽의 문명이며, 우리 시대에 와서야 아시아인들이 현대화의 필요를 자각하였다.”35J. Salwyn Schapiro, Modern and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Cambridge, Mass: Houston Mifflin Co., 1957), p. 617.고 J. 살윈 샤피로(J. Salwyn Schapiro)는 그의 저서 「유럽 현대사」(Modern and Contemporary Europe History)에서 말하였다. 분명히 아시아 국가들의 도시화는 서구의 추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A. 식민지 통치, 산업혁명, 급속한 도시화

인도의 역사가인 파니카(K.M. Panikkar)는 그의 저서 「아시아와 서구의 지배」(Asia and Western Dominance)에서 아시아 역사의 바스코 다 가마 시대(the Vasco Da Gama Epoch: 1498-1945)를 팽창기(1498-1750), 정복기(1750-1858), 제국통치기(1858-1914), 유럽후퇴기(1918-1939)의 네 시기로 나누고 있다.36Panikkar, p. 8.

포루투갈, 스페인, 화란, 영국, 독일, 미국 등 유럽의 열강들과 2차대전 때의 일본이 일본과 태국을 제외한 전 아시아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식민주의자들과 서구 선교사들이 식민지 내에 도시들을 건설함에 따라 서양 문물과 함께 산업 발전, 현대식 교육, 과학, 의학을 동양에 불러들임으로써 특별히 도시에서 급격한 삶의 양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실론은 포르투갈과(1509-1658) 화란(1658-1796)과 영국(1796-1948)의 통치를 받았다.

18, 19세기에 대영제국이 전세계적으로 힘의 균형을 제공하는 ‘브리탄의 평화’(Pax Brittanica)가 계속되었다. 영국은 인도, 말레이지아, 싱가폴, 버어마, 홍콩 등을 지배했다. 화란은 인도네시아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스페인과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했다.

중국은 외국 열강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는데, 영국이 양자강 유역을, 프랑스가 남부를, 독일이 산동 지방을, 러시아가 북부를,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였다. 1983년 페리 사령관이 일본을 방문한 이후 일본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1868년 명치유신이 시작되면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은자의 나라 한국은 1882년의 개방조약에 의해 서양에 문을 열었다.

아시아에서 산업혁명은 유럽(1750-현재)과 북미(1850-현재)보다 늦게 일어났다.

중국에서 산업혁명은 1870년대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증기를 이용한 선박회사가 1872년에 설립되었고, 상해와 우성을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가 1876년에 건설되었고, 북경과 한고를 연결하는 768 마일의 철로가 1895년에 건설되었다. 최초의 전보망이 1881년에 만들어졌고, 1890년에는 한양철강소가 시작되었다. 티모디 리차드(Timothy Richards)가 상해에 최초의 공립학교를 설립한 것은 1891년이었다.

일본은 1895년에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일반인들과 중산층이 자유롭게 사업을 시작하였고, 산업혁명의 두번째 국면은 20세기 초반에 일어났다(1901-1912). 현대 일본의 경제적 기적의 계기는 한국전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950-1953).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화란의 동인도회사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 회사들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의 주요 항구도시에 광범위한 무역 거점을 둠에 따라 이 도시들의 인구는 급격히 불어났다. 식민지 통치 하에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의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1850년대와 1880년대에 말레이지아로 이주해서 담배농장에서 일하였다. 그결과 오늘날에도 동남아시아의 주요 도시에 수많은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이 있으며, 이들은 그 나라의 경제를 주름잡고 있다.

극동의 급속한 도시화는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것이며, 지난 25년간의 산업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83년, 일본의 57,330,000명의 취업자들 중에서 18,820,000 명(32.8%)이 공장 근로자로, 14,080,000명(24.5%)이 공장과 관련된 근로자인 것으로 분류되었다. 수백만 명의 이 근로자들이 동경이나 오사카/고베와 같은 도시에 거주하는 것이다.37Manoru Nakajima, “Factory Workers in Japan,” Asia Theological News, Vol. 12, No. 4(Oct.-Dec., 1986), p. 8.

서울과 까오슝과 같은 도시에 수출 공단이 들어서면서 수백만 명의 일군들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했다.

예를 들어서 대만산업인복음협회(the Taiwan Industrial Evangelical Fellowship)의 책임자인 차 쿠샨(Tsai Kuo-Shan)박사의 보고에 의하면, 그 산업지구는 1952년에 80,000명 가량, 1983년에 280만 이상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1989년에는 전체 노동인력의 46.9%인 3,863,000 명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1953년과 1982년 사이에 농업 인구는 52.1%에서 18.9%로 격감한 반면, 산업 인력은 16.9%에서 41.2%로 늘어났다.38Tsai Kuo-Shan, “Growing Factory Evangelism in Taiwan.” Asia Theological News, Vol. 12. No., 4(Oct.-Dec., 1986), pp. 4-5.

아시아의 도시들은 서구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인구 과밀화로 인해서 경제, 정치, 사회, 도덕적인 문제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고 있다.

급격한 산업화의 무서운 결과 중의 하나는 슬럼의 형성이다. 1983년 도시연구센터(the Center for Urban Studies)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3백만 인구를 가진 다카의 771개 빈민지역에 약 730,00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금세기 말까지 이 도시빈민들은 2천만 인구의 다수를 차지할 지도 모른다. 마닐라의 빈민가의 처참한 조건에 필리핀 교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39Viv Grigg, “The Urban Poor: Prime Missionary Target,” Evangelical Review of Theology, Vol. 2, No.3(July, 1987), pp. 263-265.

방콕에는 1,020개의 슬럼이 있는데(Sopon, 1985) 반해 그 지역에 두개의 교회와 두개의 가정교회 밖에 없는데, 두명의 기독교 사역자가 600,000명의 매춘부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고 있다. 1986년 초에 말레이지아에서는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500,000의 약물 중독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교회사는 폭넓게 전개되었다. 인도교회는 그 기원을 1세기의 성 도마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려고 주장한다. 3세기에 쓰여진 「도마 행전」(the Acts of Thomas)은 인도 북부와 남부에서의 도마의 사역을 서술하고 있는데, 226년까지 인도 북서부, 아프가니스탄, 발루크 지방에 주교들이 있어서 선교사역을 했다고 전한다.

마르코 폴로가 1288년과 1292년에 인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났고, 시리아계통의 말을 사용했던 도마교회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7세기와 13세기 사이에 네스토리안 교회가 중국에 소개되었고, 로마 카톨릭 수도사들과 예수회 회원들이 13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아시아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개신교 선교는 캘커타에서(1793) 윌리엄 케리에 의해, 중국에서(1807) 로버트 모리슨에 의 해 시작되었다. 19세기에는 유럽과 북미의 많은 선교회들이 아시아로 선교사를 보냈다.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시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대중교육은 엘리트들 만이 교육의 기회를 누렸던 많은 아시아 나라에서 전통적인 교육 체제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결과적으로 선교사들의 교육은 많은 아시아 나라의 도시에서 중산층의 “화이트 칼라” 기독교를 형성하게 되었다.

많은 서양 선교회들이 도시 사역에 치중한 반면,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창설된 중국내륙선교회(the China Inland Mission)는 중국 내륙에서의 선교를 강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아시아의 급격한 도시화에 비추어볼 때, 현지 교회들과 해외선교기관들이 도시사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세계선교 및 전도 소위원회 산하의 도시선교회(Urban Rural Mission)는 싱가폴 등 세계 각지에 지역 사무소를 ㅈ두고 있으며, 일년에 서너차례 발행되는 「URM 뉴스레터」를 통해 도시선교를 추진하고 있다. 에큐메니칼적인 ‘오늘의 구원의 신학’이나 ‘행동 신학’ 등이 도시선교의 신학적인 토대가 되고 있다.

목사들에게 도시사역을 훈련시키기 위해 다수의 도시 연구센터들이 아시아 각지에 세워졌는데, 한국의 연세대학교의 도시연구개발원(the Institute of Urban Studies and Development), 일본의 간사이근로자문화교육원(Kansai Institute for Workers’ Cultureand Education), 필리핀의 그리스도인들이 활용하기도 하는 정부기관인 아시아노동교육원(the Asia Labor Education Center) 등이 그것들이다.40Richard P. Poethig, “Theological Education and the Urban Situation in Asia,” The South East Asia Journal of Theology, Vol. 13, No.2(1972), p. 66.

비록 인도에서는 대규모 기독교 운동이 시골에서 일어났지만, 인도복음협회(EFI: Evangelical Fellowship in India)는 서부의 푸나와 북동부의 실롱이라는 두 도시에서 ‘도시 전도돌격 계획’(City Penetration Plan)을 개시했다. 다양한 전도 문서가 가정과 학교와 대학에 뿌려졌다. 동시에 부흥집회가 지역교회에서 열렸고,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나 기독교 교육 세미나가 잇따랐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던 실롱 지역에서는 그 계획이 성공적이었지만, 철학적인 힌두교가 강한 푸나에서는 열매가 적었다.41Theodore Williams, “India, A Seething Subcontinent,” The Church in Asia, ed. Donald Hoke(Chicago: Moody Press, 1975), pp. 223, 257.

국제선명회(World Vision)의 후원 하에 레이 박크(Dr. Ray Bakke)는 인도의 8대 주요도시에서 도시사역 좌담회를 열었다. 그 결과로 전국에 걸쳐서 다수의 도시사역자들의 교제가 이루어졌다.

봄베이 도시사역 협회(Bombay Urban Fellowship)가 1985년에 시작해서 그 도시의 1천만 시민들을 위해 매달 만나서 기도하고 있다. 1987년에는 50명 이상의 회원들이 여러 도시 사역 프로그램에 관련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도왔다.

이와 비슷하게 도시전도를 위한 마드라스 위원회(Madras Committee on Urban Evangelism)도 매월 400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서 그 도시를 위해 금식과 기도를 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1985년에 설립된 아메다바드 도시전도협회(Ahmedabad Urban Evangelistic Fellowship)는 50,000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웠다.42P. Winfred Jeyaraj, “Indian Churches Strategize for Urban Mission”, Together(Monrovia, CA: World Vision International, April-June, 1988), p. 10.

필리핀 십자군(the Philippines Crusade)의 대표인 멭 카스틸로(Dr. Met Castello)는 필리핀교회에 도시에 적합한 방법으로 도시사역에 더욱 매진하도록 촉구하였다. 필리핀 문화가 ‘바야니한 정신’(공동체 자립)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도시사역을 위해서는 파괴적인 비평, 정죄하는 태도, 극단적인 개인주의 등의 외래적인 요소에 대항해서 건전한 팀 정신을 북돋아야 한다.43Met Castillo, “Shepherding the Urban Church,” Philippines Church Growth News, Vol. 5(April-June, 1982), p. 6.

1945년 이래로 아시아의 정부가 추진해온 급격한 국수주의와 전통적인 가치들의 재생으로 교회가 시골 지역의 공동체에 복음을 전하기가 점점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반면에 오늘날 대규모의 도시이주 현상과 급격한 자국 문화의 변천으로 도시 전도를 위해서는 폭넓은 기회가 주어졌다.

결론

배렛의 보고에 의하면, 1985년 기준으로 볼 때 세계 10대 도시 가운데 네 도시가 아시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경/요코하마(21,800,000), 상해(17,500,000), 북경(14,600,000), 서울(10,200,000) 등이 그 도시들이다.

서기 2025년에는 세계의 10대 도시 가운데 일곱 도시가 아시아에 있게 될 것이다. 상해(36,100,000), 북경(31,900,000), 봄베이(27,000,000), 캘커타(26,400,000), 쟈카르타(23,600,000), 다카(23,500,000), 동경/요코하마(20,700,000), 마드라스(20,600,000) 등이 바로 그 아시아의 도시들이다.44Barrett, pp. 45-46. Bakke의 통계에 의하면, 서기 2000년에는 세계의 25대 도시 중에 17 도시가 아시아의 도시일 것이라고 한다.

1985년에는 인구 100,000 명 이상의 도시가 2,400개, 인구 1백만 명 이상의 대도시가 276개 있었다. 서기 2000년까지는 세계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45Raymond Bakke, “Sociology and Demographics of World Class Cities,” unpublished paper at the Trinary Consultation on Evangelizing World Cities in Chicago(March 14-17, 1986), pp. 4-5.

이러한 엄청난 숫자들이 오늘날 아시아의 교회에, 특별히 아시아의 신학교육기관 및 선교기관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1. 우리는 신학교/선교훈련원 교과목에 도시사역 과목들을 개발하고 이 분야에 대한 학위를 수여해야 한다. 양질의 강의와 연구자료들을 공급해야 한다.
  2. 신학생/선교사 후보자들을 위해 보다 더 도시사역 지향적인 실제적인 일을 찾아내야 한다. 목회자들을 위한 계속적인 도시사역 교육이 또한 필요하다.
  3. 다양한 종류의 연장교육(TEE)과 같은 도시 교회의 평신도를 훈련하기 위한 비전통적인 신학교육의 형태를 더 많이 찾아내야 하겠다.

1세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 상태를 보며 우셨던 것 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도시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기 위해 주님의 그 동정심과 부담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주해

  • 1. Raymond J. Bakke, “Evangelization of the World’s Cities,” An Urban World: Churches Face the Future, ed. Larry L. Rose and C. Kirt Hadaway(Nashville: Broadman Press, 1984), p. 89
  • 2. Ervin E. Hastey, “Reaching the Cities First: A Biblical Model of World Evangelization,” An Urban World: Churches Face the Future, ed. Rose and Hadaway, p. 148.
  • 3. Hastey, pp. 147-165.
  • 4. David B. Barrett, World Class Cities and World Evangelizatiion(Birmingham, Alabama: New Hope, 1986), p. 40.
  • 5. Ibid.
  • 6. Harvie M. Conn, “The Kingdom of God and the City of Man,” Discipling the City, ed. Roger S. Greenwa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4), pp. 14-15. See Raymond J. Bakke, The Urban Christian(Bromley, Kent:MARC Europe, 1987), pp. 85-87.
  • 7. Barrett, p. 41.
  • 8. Hastey, p. 39.
  • 9. Ibid.
  • 10. Lewis Mumford, The City in History(N.Y.: Harcourt Brace Jovanvich, 1961), pp. 246-247. See Hastey, p. 40.
  • 11. De Civitate Dei, XIV, 28, quoted in A.H. Armstrong, ed.,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Greek and Early Medieval Philosophy(London: Cambridge Univ. Press, 1967), p. 414. See Conn, pp. 15, 16.
  • 12. Conn, p. 40.
  • 13. 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Zondervan, 1981), pp. 240-241.
  • 14. Barrett, p. 41.
  • 15. Conn, pp. 18-19.
  • 16. K. M. Panikkar, Asia and Western Dominance(London: George Allen and Urwin LTD., 1961), p. 13.
  • 17. Harvie Conn은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도시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네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대의 도시를 위해서는 ‘코스모폴리스’(Cosmopolis), 중 세 도시를 위해서는 ‘데오폴리스’(theopolis),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도시들을 위해서는 ‘메가폴리스’(megapolis), 현대도시들을 위해서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See Conn, pp. 10, 13, 26, 28.
  • 18. Bong Rin Ro, “The Church and State in Calvin,”(unpublished S.T.M. thesis, Concordia Lutheran Seminary, St. Louis, 1967), pp. 20-21.
  • 19. Ibid., pp. 52-56.
  • 20. Conn, p. 21.
  • 21. Barrett, pp. 42-43.
  • 22. Conn, p. 27.
  • 23. Ibid., p. 48. See Barrett, p. 49.
  • 24. William N. Kerr, “Historical Evangelical Involvement in the City,” The Urban Mission, ed. Craig Ellison(Grand Rapids: Eerdmans, 1974), p. 29.
  • 25. Ibid., p. 30
  • 26. Ibid., pp. 32-33.
  • 27. Roger S. Greenway, “History of Evangelizing World Class Cities,” unpublished paper at the Trinary Consulatatiion on Evangelizing World Class Cities in Chicago, March 14-17, 1986, p. 16.
  • 28. Ibid., p. 21.
  • 29. Ibid., p. 22.
  • 30. J.L. Neve,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2(Philadelphia: The Muhlenberg Press, 1946), pp. 316-318, 324-325.
  • 31. Greenway, pp. 23-24.
  • 32. Conn, pp. 47-51.
  • 33. Stephen Nei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Baltimore Maryland: Penguin Books, 1971), p. 456.
  • 34. Conn, p. 52.
  • 35. J. Salwyn Schapiro, Modern and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Cambridge, Mass: Houston Mifflin Co., 1957), p. 617.
  • 36. Panikkar, p. 8.
  • 37. Manoru Nakajima, “Factory Workers in Japan,” Asia Theological News, Vol. 12, No. 4(Oct.-Dec., 1986), p. 8.
  • 38. Tsai Kuo-Shan, “Growing Factory Evangelism in Taiwan.” Asia Theological News, Vol. 12. No., 4(Oct.-Dec., 1986), pp. 4-5.
  • 39. Viv Grigg, “The Urban Poor: Prime Missionary Target,” Evangelical Review of Theology, Vol. 2, No.3(July, 1987), pp. 263-265.
  • 40. Richard P. Poethig, “Theological Education and the Urban Situation in Asia,” The South East Asia Journal of Theology, Vol. 13, No.2(1972), p. 66.
  • 41. Theodore Williams, “India, A Seething Subcontinent,” The Church in Asia, ed. Donald Hoke(Chicago: Moody Press, 1975), pp. 223, 257.
  • 42. P. Winfred Jeyaraj, “Indian Churches Strategize for Urban Mission”, Together(Monrovia, CA: World Vision International, April-June, 1988), p. 10.
  • 43. Met Castillo, “Shepherding the Urban Church,” Philippines Church Growth News, Vol. 5(April-June, 1982), p. 6.
  • 44. Barrett, pp. 45-46. Bakke의 통계에 의하면, 서기 2000년에는 세계의 25대 도시 중에 17 도시가 아시아의 도시일 것이라고 한다.
  • 45. Raymond Bakke, “Sociology and Demographics of World Class Cities,” unpublished paper at the Trinary Consultation on Evangelizing World Cities in Chicago(March 14-17, 1986), p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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