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화와 성경번역-모스꼬나 부족의 사례를 중심으로

현대선교4 (Current Mission Trends). 발행 : 1993년 8월 25일, 서울:GMF Press. 수록면 : 29-39.

정민영
성경번역선교회(GBT) 선교사

1. 서론

1.1. 선교와 상황화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빠지기 쉬운 두 가지 함정은 선교사 자신의 문화적인 특성들을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인양 착각하여 현지인들에게 강요하는 일(ethnocentrism)과 현지의 문화적인 요소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복음의 순도(純度)를 떨어뜨리는 일(syncretism)이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이러한 시행착오들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교회는 그러한 실수들을 통해 선교 전반에 대한 소중한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

복음은 진공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상황과 역사 속에서 계시되고 전승되었다. 따라서 복음을 바로 이해하려면 구원계시가 주어지던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옳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수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방면에 대한 방대하고도 풍부한 자료들을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문제는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계시되었던 복음을 그와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신구약 성경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계시되었던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이 올바로 깨닫도록 전달할 것인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21)

누가 감히 바울을 혼합주의자로 매도하며 돌을 던지겠는가?

1.2. 선교와 성경번역

하나님의 말씀은 선교행위와 토착교회 설립의 필수불가결한 도구이자 원천이다. 성경이 없이도 외형적인 교회의 설립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의 교회는 세워질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

성경 없는 선교행위의 결과로 태동한 중남미 교회가 미신화, 사교화되고 만 것이 그 좋은 사례이자 증거라 할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성경은 반드시 모어(母語)로 번역, 전달되어야 한다. 혹자는 성경원어나 국가 공용어, 또는 영어나 심지어는 한국말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자고 강변하기도 한다. 경험적으로나 성경적으로 타당성이 없는 방법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강림과 방언 현상은 복음전달자가 피전도자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신 사건이었다. 따라서 모어성경이 없는 토착교회의 개척이란 불가능하다.

저명한 교회사가인 라토렛(Kenneth Latourette)은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모어로 기록된 성경을 소유하지 못한 토착교회가 제대로 생존한 사례가 없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번역이란 일반적인 선교사역으로 간주되고 있는 교회개척 사역(church planting)에 필수적으로 선행(先行)되어야 할 전초작업이랄 수 있다.

성경은 교회개척의 도구일 뿐 아니라 토착교회의 성장과 자립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자신의 선교지인 에베소 교회를 떠날 때 선교사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께 그들을 의탁하면서 그 말씀이 그들을 능히 든든히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 20:32).

선교사가 현지에 항상 머물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또 토착교회의 자립을 위해 필요 이상 머물러서도 안된다. 선교사가 없어도 성경이 있다면 토착교회는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져 갈 것이다.

1.3. 모스꼬나(Moskona)의 상황

필자의 사역대상인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 지역의 모스꼬나 부족이 복음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지난 1979년 팀 선교부(The Evangelical Aliance Mission) 소속 프라이스 선교사 가정(John & Linda Price)이 이미 오래 전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인근 부족 출신 토착인 사역자 세 가정과 함께 이 지역에 첫 발을 내딛게 되면서부터였다.

사방이 정글 산악과 늪지로 첩첩이 둘러싸인 내지(內地)인지라, 그 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 비해 복음의 도입이 늦은 편이었다.

그 후 복음을 전하고 토착교회를 세우는 일이 지리적, 언어적 장애 요인으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기도 했지만, 모스꼬나 말로 기록된 성경이 없는 것이 무엇보다 근원적인 문제였다.

모스꼬나 복음화를 위해 10여 년을 씨름해 온 프라이스 가정이 마침내 내린 결론은 성경이 없이는 교회의 개척이나 성장이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우리 선교부에 성경번역 선교사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당시 사역대상을 물색 중이었던 우리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2. 성경번역과 상황화

토착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은 원어성경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올바른 해석과 상황적 적용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데, 여기에는 문화인류학적 이해와 언어학적 소양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언어학의 발달이 번역이론의 체계적 정립에 기여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역으로 성경번역의 가속화를 통한 풍부한 실제적, 임상적 자료들과 사례들을 통해 언어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한 때 응용언어학의 한 부분에 머물던 번역이론이 이제는 체계적인 학문분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1. 문자적 번역의 모순

문자적 (혹은 여자적) 번역을 마치 충실한 번역의 원칙으로 이해하던 때가 있었다. 상황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자, 표현형식(form)과 의미(meaning)를 동일시하는 오해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모든 토착적 상징이나 표현형식의 사용을 혼합주의로 간주하고 정죄하는 오류를 낳았다.

종교적인 암흑시대를 자초한 중세교회가 바로 이러한 함정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주후 4세기에 제롬(Jerome)이 번역한 라틴어(Latin Vulgate)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금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번역자 위클리프(John Wycliffe)을 정죄하고 틴데일(William Tyndale)을 처형했다.

라틴어를 마치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언어인양 착각했을 뿐 아니라, 라틴어라는 표현형식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은 곧 의미의 굴절인양 오해했던 것이다.

정작 제롬이 번역에 사용한 라틴어는 고상한 고전 라틴어가 아닌 평범한 ‘언문’이었고, 더구나 성경원어도 아니었다. 설사 성경원어라 할지라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천가지의 언어들 중 하나일 뿐이지 ‘거룩한’ 언어일 수는 없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코이네(Koine) 헬라어 역시 당시에 높이 평가되던 고전 헬라어가 아닌 평민들의 언어였다. 게다가 비교적 학식과 교양을 갖춘 편이었던 바울이나 누가의 책 이외의 글들은 문학적인 수준이나 문체의 품위가 그리 높거나 고상한 게 못되었다.

중요한 것은 특정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를 매체로 표현된 내적인 의미와 메시지인 것이다. 성경원어라는 특정 표현형식 자체를 거룩하게 보고 토착어나 토착문화를 모두 이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중세교회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언어마다 표현방식이 천차만별임에도 불구하고 문자적 번역을 고집하는 것도 그러한 사고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형식을 중시하여 거기에 억지로 맞추려다 내용을 왜곡시킬 뿐 아니라, 부자연스럽고 생경한 표현방식으로 인해 현지인들의 개념 속에 기독교를 외래종교로 고착시키는 심각한 부작용과 아울러 중국의 삼자교회와 같은 반작용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2.2. 표현형식(form)과 의미(meaning)

특정 의미에 대한 표현형식은 언어마다 다르며, 특정 표현형식(단어나 구절)이 함축하는 의미의 범주(semantic range/boundary)도 언어에 따라 다양하다. 다른 두 언어에 등가(等價)의 의미범주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형식이란 지극히 희귀하다.

예컨대, 영어의 ‘to play’가 담고 있는 우선적인 의미(primary meaning)는 우리말로 ‘놀다’이지만, ‘to play piano’를 ‘피아노를 놀다’라고 번역해서는 안되고 ‘피아노를 치다’라고 해야 한다. 즉, ‘to play’에 함축된 추가적인 의미들(extended meanings) 중에 ‘연주하다’가 포함되어 있어서, ‘to play’와 ‘놀다’ 사이의 의미적인 중첩에도 불구하고 이 문맥(context)에서는 등가의 표현형식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상황(혹은 문맥)을 무시한 채 두 단어를 문자적, 기계적으로 대입(代入)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단어(word) 뿐 아니라 구(句), 절(節), 문장과 그 이상의 차원에서도 적용되는 번역의 기본원리이다.

예컨대, Moskona의 odui efef란 동사구(動詞句)의 문자적인 뜻은 ‘간(肝)이 아프다’이나,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 사랑, 연민, 슬픔 등 다양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2.3. 표면구조(surface structure)와 심층구조(deep structure)

위에 언급된 원리가 절(節)이나 문장 이상의 차원에서도 적용되는 현상을 보려면 언어가 갖는 이중구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의사전달에 있어서 표면상에 나타난 것(표면구조)과 의사전달자의 실제의도(심층구조)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으며, 언어에 따라 두 구조의 조합형태도 다양하다.

한 예로 이른바 수사학적 의문문(rhetorical questions)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 표면구조는 질문이지만 심층구조는 비난이나 부정(否定)일 수 있다. 우리말에서도 남에게 시비를 걸거나 비난할 때 이러한 형식을 종종 취하게 된다.

예컨대, ‘그걸 말이라고 하니?’라든가 ‘어쩌면 그럴 수가 있니?’가 표면상으로는 질문이지만, 모르는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아님을 우리말의 이중구조에 익숙한 독자는 알 것이다. 반어법(反語法)도 그와 유사한 경우라 할 것이다. 예컨대, ‘참 자알 한다!’란 잘못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한 언어에서 이러한 방식이 사용된다 해도 다른 언어에서는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모스꼬나 말에서는 수사학적 의문문이나 반어법 등의 기법이 사용되지 않고, 표면상의 의문문은 항상 모르는 정보에 대해 묻는 의미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수사학적 의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심각한 의미의 왜곡을 초래할 것이다.

2.4. 의미 중심적 번역(Meaning-based translation)

번역이란 결국 형식의 전달이 아니고 그 안에 의도된 내용(의미)의 전달이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은 문자적인 번역이 아니라 원래의미를 되도록 손상하지 않고 최대한 보존하여 옮기는 것이다. 성경번역은 원어에 담긴 의미를 추출하는 일(decoding)과, 그 의미를 해당 토착어로 옮기는 일(encoding)의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의미 추출은 일종의 해석적인 작업으로서 원어에 대한 소양은 물론 의미론적 분석(semantic analysis) 능력이 요구된다. 그릇된 의미 추출은 마치 첫 단추를 잘못 꿰는 것과 같은 중대한 실수라 할 수 있다.

성경번역은 당연히 원전으로부터 해당 언어로 직접 전환하는 작업이다. 영어성경이나 한글성경을 참고자료로 쓸 수는 있겠지만 거기서 직접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해석 과정을 거친 역본을 또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은 해석의 과정을 중복 시행하는 것으로서 원래의 의미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2.5. 의미적 충실성(fidelity)과 표현의 자연스러움(naturalness)

번역자는 원문에 실린 의미가 번역하고자 하는 언어(receptor language)로 충실하게 전달되도록 노력해야 함은 물론, 해당 언어의 사용자가 무리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고 매끈한 표현으로 옮겨야 한다. 내용이 중요하지만 내용을 담는 표현이 부자연스러울 경우 내용의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의미적 충실성과 자연스러운 표현은 바른 번역에 필수적인 두 요소이다.

3. 상황화 사례

성경번역 과정에서 요구되는 상황화 작업의 실제를 모스꼬나의 몇몇 사례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한다. 더 다양한 사례들을 들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소개한 것으로 상황화 작업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리라 본다.

3.1. 수사학적 의문문(rhetorical questions)과 반어법

이미 언급한대로 모스꼬나를 비롯한 많은 언어에서는 이러한 표현기법이 사용되지 않으므로 의역(meaning-based translation)이 불가피하다. 몇가지 예들을 아래 소개한다. (밑줄 부분 = 모스꼬나 말)

3.2. 비유적 표현

비유는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문화 및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비유적인 표현의 문자적인 대입은 금기이다.

예컨대, 예수께서 ‘헤롯은 여우다’라고 하셨는데, 다행히 우리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는 여우의 이미지와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유사하여 우리말로는 직역이 가능했지만,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 직역할 경우 Mexico의 Cuicatecox 부족은 헤롯을 ‘동성연애자’로, Villa Alta의 Zapotec 부족은 ‘울보’로, Otomi 부족은 ‘닭 도둑’으로, Brazil의 Maxakali 부족은 ‘빨강머리’로 이해하며, 여우를 본 적이 없는 모스꼬나 부족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3.3. 관용적 표현(idiom)

관용적인 표현 역시 특정 문화의 산물이다. 외국어를 배워 본 이라면 누구나 관용구라는 함정 때문에 실수하고 당황했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바른 번역을 위해서는 원어(source language)와 대상언어(target language)에 나타나는 관용적 표현들을 다 파악해야 한다.

원어상의 관용구가 대상언어의 관용구로 옮겨지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관용구의 뜻을 풀어서 번역하게 된다. 또한 원어상에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도 대상언어로 그 의미를 최선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관용구인 경우도 있다.

모스꼬나 말에 mood efeu라는 명사구가 있다. 문자적으로 ‘작은 집’이란 뜻이어서 오랫동안 그런 의미로만 알고 사용했는데, 후에 그것이 ‘출산(出産)을 앞둔 산모를 위해 별도로 짓는 원두막’을 지칭하는 관용구였음을 깨닫고 매우 당황한 적이 있다.

문화적으로 이 집에는 남편과 아버지, 형제를 포함한 모든 남자의 접근이 금기시(禁忌視)되고 있는데, 그간 필자가 혹 말의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비슷한 예들을 아래 소개한다.

3.4. 함축된 정보(implied information)

의사전달자는 피전달자와 공유하고 있는 정보(shared/understood information)는 굳이 표현하지 않고 생략하는 법이다. 사족(蛇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보를 공유하지 못한 다른 언어나 문화권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주어야 한다.

필자가 소속하고 있는 선교부(GBT) 산하의 선교사들은 주로 신약성경 번역을 사역목표로 하고 있는데,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 메시지가 많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구약적 배경에 관한 설명을 첨가해 주어야 할 경우들이 종종 발생한다.

모스꼬나 말에 eherk라는 동사가 있는데, ‘긁어내다(to scrap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긁는 동작을 나타내는 다른 동사들도 많지만, 가축이나 사냥한 짐승을 잡아 불에 그을린 후 요리하기 위해 털을 긁어내는 행위를 묘사할 때는 반드시 이 동사가 사용된다. 따라서 이 동사가 사용되면 짐승이 도살되어 불에 그을렸다는 함축된 정보가 모스꼬나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는 보충설명을 추가해야 한다. 예컨대, Ofa eherk meek eweesy의 문자적인 뜻은 ‘그가 돼지털을 긁었다.’이지만 ‘그가 도살되고 불에 그을린 돼지의 털을 긁어냈다.’로 번역해야 제대로 이해될 것이다.

3.5. 몸짓(gesture)

몸짓은 일반적으로 의사소통의 한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문화에 따라 특정 의미에 대한 표현방식이 다양하듯 몸짓 또한 천차만별이며 특정 몸짓이 의미하는 바도 각각 다르다. 따라서 몸짓 역시 상황화 작업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조롱하는 행위(막 15:29)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었을지 모르나, 모스꼬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몸짓이기 때문에 직역했을 경우 이해하는 데 어려움과 혼란이 따를 것이다. 당시의 머리를 흔드는 행위와 유사한 의미를 내포하는 몸짓을 발견하여 대치하거나, 아니면 imutut unggrir ‘박장대소하며 놀리다’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3.6. 시간적 선후개념과 어순(語順)

모스꼬나 말을 포함한 많은 부족어에서는 ‘…이전(before), …이후(after)’란 표현기법이 없이 사건의 추이에 따라 순서대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때문에, 복음서와 같은 이야기체(narrative)의 글을 번역할 때는 본문에 기술된 순서를 기계적으로 따르면 안되고 사건 발생의 선후 순서에 맞춰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

3.7. 우회적 표현

언어마다 문화적으로 금기시(禁忌視)하거나 기피하는 개념에 대한 우회적 표현법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감히 부를 수 없어 ‘하늘’, 혹은 ‘지존자’라 표현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사울왕이 대변 보는 것을 ‘발을 가리다’라고 한 것도 우회적인 표현의 한 예인데, 우리말 역본에서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함으로 인해 많은 해석상의 오해를 야기시켰다. 따라서 우회적 표현도 상황화의 주요 대상인 셈이다.

모스꼬나 말에서 ‘간통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 omock란 동사가 있는데, 실제로는 거의 금기시되고 있는 표현이다. 필자가 처음 이 단어의 의미를 알아냈을 때, 문화적으로 사용이 금기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간음을 금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논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사람들이 매우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여자의 치부에 해당하는 단어(ock)가 이 동사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고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이 의미에 대한 우회적인 표현으로 ecir rot이란 동사구가 따로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함께 다니다’라는 뜻이다.

3.8. 분화(分化)된 개념들

문화에 따라 중시되는 개념이나 분야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언어의 분화 현상도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영어로는 ‘rice’란 한 단어로 다 표현되는 것이 한국어에서는 ‘쌀, 모, 벼, 밥’ 등으로 분화되는 것은 이른바 ‘쌀 문화권’인 우리와 그렇지 않은 영어권의 관심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에스키모(Eskimo) 말에서는 ‘눈(雪)’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단어들이 있으며, 전통적으로 호전적이었던 모스꼬나 부족의 언어에는 ‘죽이다’나 ‘때리다’라는 동사가 그 방법이나 양태에 따라 다양하고, 바나나라든지 대나무, 고구마 등의 단어도 그 종류에 따라 수십 가지에 이른다.

언어마다 분화의 정도나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어의 ‘rice’를 기계적으로 ‘쌀’이라 대입할 수 없듯이, 해당 언어들의 분화상태를 바로 파악하여 적절한 상황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가령, ‘안드레의 형제 베드로(Peter, the brother of Andrew)’를 모스꼬나 말로 번역하는 경우, ‘형제(brother)’라는 일반명사가 모스꼬나 말에 없고 성별과 나이에 따른 상대적인 칭호들(terms of reference)만 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두 사람의 관계를 잘 파악하여 바른 용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번역은, Petrus noga Andarias ofoon mokar ‘안드레의 형 베드로’가 되는 셈이다.

4. 결론 – 상황화 작업의 함정과 대책

표현형식(form)과 의미의 조합이 항상 임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징(symbol)의 성격상 형식과 의미의 분리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십자가’나 ‘(유월절) 양’ 같이 성경 전체를 통해 신학적인 무게가 많이 걸려있는 표현을 경솔하게 다른 용어로 대치했을 경우, 해결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러한 경우는 신조어(新造語)를 만들고 별도의 해석을 덧붙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토착어에서 이교적 핵심사상과 맞물려 있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상징물에 대한 토착인의 관점이 자기네 문화적 선입견에 의해 영향을 받아 심각한 오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차적인 상황화 작업을 거친 역본은 해당언어를 구사하는 현지인이 바르고 무리없이 이해하는지 검증한 후에야 공식화될 수 있다.

옳바른 상황화 작업에의 지름길이란 없다. 먼저 해당 언어 및 문화를 바로 이해하고 터득하는 것이 필수요건인데, 이를 위해서는 장구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절대 필요하다. 조급한 시도는 금물이다. 섣부른 판단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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