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의 상황화 작업

현대선교4 (Current Mission Trends). 발행 : 1993년 8월 25일, 서울:GMF Press. 수록면 : 42-62.

문상철
한국선교정보연구센터 연구원

서론(序論)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 있어서 마르코 폴로(1254-1324)의 역할은 전혀 다른 문명 세계를 이해하고 알리려는 점에서 역사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20 여년간 중국에 살았지만, 그의 동방견문록은 과장과 은유적인 문체로 쓰여져 신빙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의 문헌, 인쇄, 차(茶) 그리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배경으로 우리는 문화적인 장벽과 처음 그 문화의 장벽을 넘었을 때의 엄청난 충격을 상상해볼 수 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동 서양의 문화적 거리를 넘어서, 특별히 종교적 영역에서 시도를 한 사람이 마테오 리치(1552-1610)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미지의 세계에서 어떻게 복음을 설명하고 이해시킬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였고, 이러한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그는 상황화의 중요한 역사적 선례를 남겼다. 실로 그의 사역은 본격적인 의미에서 기독교와 유교의 처음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의 한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적 등장인물들의 지엽적인 행동 만을 가지고 문제를 이해하려고 할 때 스스로 그 편협성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중국말을 하면서 중국 관리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 예수회 선교사로서 마테오 리치의 내면에 있었던 전도의 목표에 대해 촛점을 맞추는 것이 그의 행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 관대하고 수용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지적으로는 기독교에 헌신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동기와 사상이야말로 전개된 상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다. 중국과 서양 세계 모두 서로에게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관련된 인물들이 마음 속으로 상대를 거부하는 태도가 응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의 선교적 접근은 상황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다소 모험적으로 이러한 장벽을 넘어서서 진정한 대화를 시도한 역사적인 예이며, 선교사적으로는 하나의 중요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 소논문에서는 마테오 리치의 행적을 소개하면서, 그 배경이 되는 요소들을 분석한 후, 그 내용에 대해서 해석하면서 조심스레 이 역사적인 상황화의 예를 평가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마테오 리치의 선교적인 목적의식에 대해 신뢰감을 가진다면, 후세 사람으로서 그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독특한 입장에 처한 선교사의 고민을 이해하려는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1. 마테오 리치의 행적(行蹟)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 10. 6 – 1610. 5.11)를 이탈리아 태생의 예수회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 중국과 서구와의 상호 이해를 시도한 개척자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므로써 당시 외국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내륙으로 들어간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초기 생애와 교육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 중부의 마세라타(Macerata)의 한 명문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죠반니 바띠스따 리치(Giovanni Battista Ricci)는 직업이 약사였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공적인 일에 바쳤고 한 때는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죠반나 안지오렐리(Giovanna Angiolelli)는 단순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마테오 리치는 가정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에, 예수회(Jesuits) 신부들이 1561년에 마세라타에 세운 학교에 들어 간다. 여기서 고전을 공부한 후에 그는 16세에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떠난다. 로마에서 그는 예수회 신부들의 삶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1571년 8월 15일에 예수회 가입을 신청하게 되었다.

1540년에 교황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은 예수회는 사도적인 선도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수회의 회원들은 신세계로의 여행과 과학에 대한 연구로 특별한 존재로 알려지게 되었다.

선배들의 모습에 도전을 받은 마테오 리치는 자신도 이 두가지 부분에 노력을 기울였다. 저명한 수학자인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아래에서 과학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는 극동(極東)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에 자원하게 되었다. 1577년에 그는 포르투갈로 가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코임브라 대학(Coimbra University)에서 잠깐 연구하기도 했다.

이듬해 3월 24일, 그는 리스본에서 배를 타고 인도의 중서부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의 거점이었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거기서 사제 수업을 쌓았지만, 사제 서품은 건강상의 이유로 보내어졌던 말라바 해안(Malabar Coast)에 있는 코친(Cochin)이라는 곳에서 1580년에 받았다. 1582년 4월 고아에 되돌아왔을 때 그는 중국을 향해 가도록 명령을 받게 되었다.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은 기독교 선교사들, 특별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가기를 열망했던 땅이었다.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의 성 이그나티우스(St. Ignatius of Loyola)의 초기부터의 동료였던 성 프란시스 싸비에르(St. Francis Xavier)는 1552년 견고히 닫혀있는 중국 대륙을 목전에 두고 샹츄안(Shangchuan)이라는 작은 섬에서 죽어갔다.

마테오 리치가 도착했을 때도 중국은 여전히 바깥 세상에 대해 닫혀져 있었지만, 예수회의 선교전략은 수정되어 있었다. 중국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었다. 전에는 선교사들이 서구의 관습을 강요하고 종교적인 의식에서 라틴어를 사용하려 했는데, 이러한 정책에 있어서 많이 변한 것이다.

선교지의 관습에 대한 새로운 접근 정책은 마태오 리치를 예수회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이 당시 극동의 예수회 선교부를 방문하고 있던 중이었던 알렛산드로 발리그나노(Alessandro Valignano)에 의해 수립되었다.

당초에는 미켈레 루기에리(Michele Ruggieri)가 포르투갈 영이었던 마캐오에 와서 중국 복음화를 준비하라는 부름을 받았고 마테오 리치는 그후에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미켈레 루기에리가 1588년 11월에 이탈리아로 돌아가버림으로써 그보다 젊은 동료에게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 부담과 영광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의 선교

마테오 리치는 1582년 8월, 마카오에 도착하자 마자 곧바로 중국어 공부에 들어갔다. 이듬해 그와 루기에리는 당시 광동(廣東) 지방의 수도였던 차오-칭(Chao-ching)에 정착할 수 있다는 승인을 받았다.

당시 그들의 사역에 관해서 마테오 리치는 중국 기독교 전래사(History of the Introduction of Christianity In China)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의 사역에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사제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거룩한 도에 대해 분명히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들을 방문하고 남은 시간에는 언어와 문화과 중국인의 관습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말도 유창하지 못하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선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웃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그렇게 조심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루기에리는 중국어로 된 최초의 카톨릭 교리문답을 발간하였고, 마테오 리치는 유명한 세계지도인 “만국도(萬國圖)” 를 발간하였는데, 이 지도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중국이 세계의 다른 곳과 지리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589년에 마테오 리치는 차오-칭(Chao-ching)에서 샤우-초우(Shao-chou로 옮기는데, 여기서 그는 유학자(儒學者)인 太素(Chu Tai-su)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그에게 기초 수학을 가르치고, 그 댓가로 만다린어를 사용하는 관리들의 사교모임에 소개받게 되었다.

太素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입은 옷이 불교 승려의 차림새라는 것을 지적하고, 중국 학자의 복장을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광동성(廣東城)을 떠나면서 곧바로 그대로 시행했다.

중국에서의 생활에 점점더 익숙해지면서, 마테오 리치는 황도(皇都)인 북경(北京)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처음의 시도는 실패하여 1595년 부터 1598년까지 남창(南唱)에 머물게 되고, 여기서 황제가(皇帝家)의 두 왕자를 사귀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왕자 중 한사람의 요청에 따라 중국어로 된 그의 첫 저작 交友論(On Friendship)을 쓰게 된다. 1599년에 그가 정착했던 남경(南京)에서는 주로 천문학과 지리학에 몰두하였다. 중국 기독교 전래사에서 그는 이러한 일의 효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제들은 중국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했던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명쾌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러한 덕분에 사람들은 사제들이 하는 말의 진실됨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고로 이에 대한 소문이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점에서 중국 외의 다른 나라들을 일컫는 말인 오랑케라는 말을 이 선교사들의 출신국가에 사용하는 것이 무색하게 됨을 물론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기까지 하게 되었다.

남경에서의 환대에 용기를 얻어 마테오 리치는 두번째로 북경 입경을 시도했다. 그 결과 드디어 1601년 정월에 스페인 출신의 동료 예수회 선교사인 젊은 디에고 판토이아(Diego Pantoia)를 데리고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록 황제가 영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북경에 머물러 살도록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이 때부터 마테오 리치는 북경을 떠나지 않으면서, 남은 여생을 중국인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치게 되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을 끌어서 개종시키려는 그의 노력의 결과로 저명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李之藻, 徐光啓, 揚廷筠(이들 세사람은 나중에 중국의 “초기 카톨릭 교회의 세 기둥”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사역을 많이 도왔는데, 특별히 문서 관계의 일을 보필했다.)

북경에서 지내는 동안 마테오 리치는 중국어로 몇권의 책을 펴냈는데, “天主實義”(1603), “二十五言”(1605), “機何原本”의 처음 6章(1607), 畸人十篇(1608) 등의 저작들이 그것이다.1이상 마테오 리치의 행적(行蹟)에 관한 부분. EncycIopedia Britannica. Vol.10. pp.39-40. 에서 인용.

마테오 리치의 사역의 결과로 1610년, 그가 죽을 무렵에는 일부 지역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남부와 중부 지역의 많은 도시에 예수회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북경에는 황실의 비호 아래 교회가 세워지는가 하면, 기독교는 많은 중국 학자와 관리들 사이에서 알려지고 존중받게 되었다.

또한 16세기 이래로 중국에는 계속 교회가 유지되었고, 1800 경에는 250,000 명 가량의 신자가 남게 되었다. 특별히 마테오 리치의 사역의 결과로 명나라 말엽에 이르기까지 궁정에서 영향력있는 개종자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유럽의 종교사상과 과학기술이 함께 중국에서 영향을 주기 시작한 동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2Ibid. Vol.16. P.356.

2. 예수회의 상황화 정책(狀況化 政策)

예수회의 창시자인 Ignatius Loyola와 같은 지방 태생이며, 파리의 Sainte-Barbe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예수회의 창립 회원이 된 프란시스 싸비에르(Frnacis: 1506-1552)는 사실상 아시아로 간 최초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황청의 재가를 받아 최초로 인도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했고, 사제를 훈련할 목적으로 고아(Goa)에 대학을 세웠으며, 일본에서 활발한 사역을 하다가, 중국 대륙에 들어가기를 대망하면서 중국의 해안 도시에서 죽은 인물이다.

바로 이 사람이 아시아에서 어떤 것을 기대하였으며, 무엇을 추구하였느냐 하는 것이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다른 후배 예수회 선교사들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회의 선교지에서의 적응(Accommodation)에 관한 정책이 그의 인도와 일본에서의 사역경험을 통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는 현지인이 복음을 얼마나 이해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태도보다는 대중 전도를 통한 대량 개종을 목표로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사역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인도에 대해 만족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인도사람들은 대체로 무지하고 예의가 없다고 평가하고는 인도에 선교사 보낼 때는 품행과 덕망이 훌륭하게 입증이 된 사람 만을 보내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싸비에르가 중국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1546년 말에 한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였다. 그는 그 상인으로부터 중국 내륙에는 돼지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애기를 들었다. 그는 혹시 그 중국인들이 성 토마스의 추종자들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일본이 발견되므로써, 그는 인도를 떠나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포르투갈 상인들은 그에게 일본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과는 달리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인도에서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지로(Anjiro)라는 일본인을 직접 만나서, 그의 기독교 교리에 관한 높은 관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안지로는 일본의 관습과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물론 정치 제도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일본에는 부(府)라고 하는 유일한 통치자가 일본 전역을 지배하고, 그 아래 14 명의 영주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을 통치하는 것은 곡소(Goxo)로서 군주와 같은 역할을 하여 다툼이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평화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곡소를 폐하거나 일으키는 것은 부(府)의 권한이기 때문에, 결국 일본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최고 통치자의 통치를 받고 있다고 설명을 한 것이다.

여기에다 안지로는 일본의 불교에 대해 얘기하면서, 불교도들이 만물을 지으신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

그리고 불교의 도덕적인 가르침이 기독교의 십계명과 유사하며, 불교도들은 염주를 가지고 기도한다는 애기까지 들려주었을 때 싸비에르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만 어떻게 개종시키면 전 일본인들이 개종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미 일본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인도 선교를 정리하고, 협의를 거쳐 일본을 향해 떠나게 된 것이다.

1549년 정월 15일에, 두 명의 다른 사제와 두 명의 하인과 얼마 전에 개종한 안지로(Paul로 이름을 바꿈)와 함께 가고시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착할 때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일본에서의 처음 1년 동안 그는 일본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 행선지라고 생각하였다.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성품들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야말로 복음을 받기에 합당하고 잘 준비된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일본인들이 외국인들을 ‘극도로 경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발견한 가장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싸비에르의 가고시마 사역의 열매는 100명의 개종자 밖에 남기지 못했다. 이것을 싸비에르는 일본인들의 죄의식 부족 때문으로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비에르가 일본 선교를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최고 통치자 부(府)만 개종시키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교와의 경쟁을 의식하는 가운데, 수도에 목표를 두고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일행이 수도에 도착하자 마자 그 도시가 군인들과 강도들에 의해 약탈당한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 속에 최고 통치자가 실질적인 힘이 없으며, 제후들이 더 이상 부(府)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다이묘(daimyo)가 실질적인 통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행은 미야꼬를 떠나 사카이를 향해 갔으며, 다시 야마구치로 돌아가게 된다. 싸비에르가 선교사의 생활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야마구치에서 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을 인도의 비세로이(Viceroy)의 공식 선교사요 고아(Goa)의 주교로 소개하였다. 청중을 모으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나가오의 다이묘도 있어서 설교할 권한을 얻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비로소 자신이 동남아의 미개하고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불교도들에게는 사도적인 가난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방 권력자의 호의적인 대우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지만, 대부분 자신의 재능과 직책 때문이라는 것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싸비에르의 정책 중 일부였고, 그는 불교 승려들과 논쟁을 하기에 이른다. 사실, 일본인들이 이 승려들을 대단히 따랐기 때문에, 싸비에르는 이들의 가르침의 신뢰성을 뜰어뜨리는 것 뿐만아니라, 그들의 사회적인 세력을 극복하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싸비에르는 결국 일본에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장래의 선교사들은 어느 정도 지역 문화와 타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로욜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학식있는 선교사들이 일본에 보내져야 하며, 대학은 불교도와 논쟁을 해보아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리고 로욜라 자신이 이 선교사들을 직접 면접하고, 검증하고 승인을 해서 보내라고 요청한다.

1551년 8월 말, 야마구치에서 성공적인 전도 성과를 얻고 난 후, 싸비에르는 포르투갈의 배가 분고(Bungo) 지방의 히지(Hiji)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즈음 싸비에르는 이미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인도로 돌아가서 자신의 문제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1551년 11월 20일에 싸비에르는 2,000명의 기독교 개종자를 남겨두고 일본을 떠난다. 1,600년 경 일본이 서구에 대해 문을 닫고 수천 명의 신자들을 처형할 당시 약 300,000명의 신자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의 일본 사역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의 2년 3개월 동안의 경험이 그에게 어떻게 일본에 성공적으로 기독교를 전할 수 있느냐 하는데 대해 구체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의 불미스러운 점이 스캔들이 되는 일본 사회에서 불교 승려들과 대비되면서 영향을 주려면, 미래의 일본선교사는 도덕적인 원칙대로 살고 의롭게 사는 사람이어야 하며 지성인이어야 한다는 분명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곧 장래 일본 선교사는 학자이면서 과학자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싸비에르의 이러한 앞선 경험이 마테오 리치 등 다음 세대의 선교사들이 사역할 때, 학문성이 강조되고 중국의 고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설득하려한 태도를 가지게 되는데 영향을 준 한 요인이 되었음은 자연스런 결과인 것이다.

싸비에르는 불교 승려들의 ‘탐욕과 비도덕성적인 생활’을 비판하고 기독교의 적인 불교와의 논쟁을 통해서 불교에 신의 개념이 없는 것에 시달려야 했다.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은 피상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면, 아미다 붓다는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800 번이나 다시 태어났으니 더 위대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고, 하나님이 절대로 선하시다고 하면, 그러면 왜 하나님이 악한 마귀를 만들었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창조주의 개념이 없는 불교의 문제에 시달린 싸비에르의 경험이 다음 세대에 마테오 리치가 유교적인 배경 가운데 지나치게 신관(神觀)에 매달리고, 구원론 등 다른 문제에 있어서 명백한 가르침을 펴지 못하는 문제로 연결되는 어떤 인과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싸비에르가 중국에 뜻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 사람들이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할 때마다 중국에 대해 말하면서 그곳에서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반복해서 들은 데 있었다. 중국은 학문이 더 발달했을 뿐 아니라 정치도 중앙집중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 복음화되면 일본도 중국이 가르쳐준 교리들을 버리고 복음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싸비에르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개종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국의 구주가 되실 것이라고 로욜라에게 편지를 쓸 때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싸비에르는 1552년 2월 말에 인도의 고아로 다시 돌아와서 유럽과의 통신과정에서 극동 지역으로 학식있는 사제들을 보내달라고 주문을 하는데, 이것이 마테오 리치 같은 학문적 열성이 뛰어난 선교사를 중국으로 보내게 되고, 중국에서의 사역의 방향도 중국 고전 탐구와 과학기술의 활용을 본격화하게 되는 중요한 전략이 수립되는 시점으로 보인다.

싸비에르의 중국에 대한 열정은 1552년 4월 고아를 떠나 한달 뒤 말라카(Malacca)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중국에 입국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잘되지 않자 불법적인 방법으로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1552년 8월 마지막 주 포르투갈 상인들과 중국 관리들에 의해 밀수가 행해지던 上川에 도착해서 중국으로 밀입국할 방법을 찾게 된다. 여기서 그는 포르투갈 상인을 금으로 매수하고, 그들이 밀입국을 주선해주도록 기다리다가 열병의 악화로 그해 12월 3일 이른 아침 숨을 거둔다. 그

해 11월 12일과 13일에 걸쳐 쓰여졌던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도 중국 복음화를 통한 아시아의 복음화의 비젼과 열정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가 제창한 문화적인 ‘적응’이라는 방법론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질적인 목적은 끝까지 변함없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싸비에르의 선교관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방법론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즉, 진리의 본질적인 능력을 무시하고 진리의 전달을 단순히 인간적인 노력과 철학적인 규명에만 의존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3이상의 내용 중 프란시스 싸비에르의 행적에 관하여 John D. Young,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the First Encounter (Hong Kong : Hong Kong Univ. Press, 1983), pp.12-22에서 주로 참조.

3. 유교(儒敎)의 신관(神觀)

공자(孔子)의 유교적인 가르침에 나타난 신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균형있는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 중국의 전통 신앙, 역사 및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여러가지 자료에 의해, 기원전 2세기 동안 중국 사람들은 다양한 능력과 성격을 가진 다수의 영(靈)들의 존재를 믿었던 것 같다. 이 영들은 인간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동체의 대표자가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영들은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는데(Anthropomorphic), 때때로 특정한 남자나 여자에게 임하여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여 마법사나 무당이 되게해서 공동체에 좋은 영향이나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한다고 믿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신관은 하(夏)나라와 상나라 등 고대 왕조 시대에 들어오면서 더 조잡한 형태의 미신에다 天(Tien)과 上宰(Shang Ti)의 개념이 부분적으로 섞이게 된다.

天이나 上宰는 우주의 최고 영적인 세력으로서 영들과 인간 모두의 주인이며, 만물이 경의를 표해야 하는 대상으로 설명된다. 이와 같은 유일신(Monotheism)의 형태와 보다 더 순수한 경배를 향해 신앙적으로 나아가는 것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의 생각에는 이 영들이 그들의 일상적인 믿음과 생활에 불가분하게 뒤엉켜 있어서 매순간 마주치기 때문에 계속해서 경배해야 할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세력들을 무시하거나 거스리면, 무시무시한 결과가 그러한 일을 저지른 인간에게 즉시 나타나기 때문에, 매순간 영들의 허락을 받고 도움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그렇지만, 다신체계의 영들과 절대적이고 다다를 수 없는 신이 함께 존재할 때 일반인의 생각은 높디높은 하늘에 있는 초월적인 신보다 가까이 에워싸고 있는 영들이 더 많은 압력을 주는 것이다.

선사(先史)시대부터 20세기 청나라가 몰락하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은 땅의 최고 통치자 만이 하늘의 통치자에게 제사를 드려야 하며, 이 땅의 통치자는 하늘과 그 백성, 上宰와 인간 사이에서 제사장과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上宰에게는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그보다 못한 영들과 조상에게만 제사를 드리도록 제한을 받는 것이다.

공자(孔子)도 군주가 上宰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고대의 理(Li)와 氣(Chi)에 따르면, 전국가적으로 적절한 의식과 제사를 지켜야 했고, 이를 위해서 백성들이 신의 비위를 맞추고 그 은택을 감사하도록 모으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초기의 유교의 고전들에서 신관이 다루어지기 전가지 한동안 결국 두가지 중요한 신앙이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간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다른 영들이나 半神半人(demigods)보다 뛰어나고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 존재이며, 오직 군주만이 공식적인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군주적인 신의 개념이다.

둘째는, 조상들의 영에 대한 숭배로서 족장(族長)이나 가장(家長)이 조상의 영들이 소속되었던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린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고대의 기록으로부터 절대적인 신(神)을 지칭하는 의미를 가진 天과 上宰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宰는 통치와 권세의 뜻을 상징화한 글자임이 분명해보인다. 그러나, 더러는 그와 같은 문제 구성상의 의미가 그대로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글자는 신적인 개념을 나타나기 위해 上(최고의)이라는 글자와 함께 붙여 쓰이거나 단독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 宰 혹은 上宰라는 단어는 인격적인 신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서 다분히 신인동형동성적인(Anthropomorphic)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단어 사용은 고전의 문맥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중국 북부의 그리스도들이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많이 쓰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天라는 글자는 大(크다)와 一(위)이 합쳐져서 된 글자인데, 처음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sky)을 가르키는 단어로서 광할함과 무한함의 사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더 나아가서는 하늘 저편 너머에 계시는 분으로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天은 땅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통치하고 주관하는 개념으로서, 운명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서, 자연스럽다거나 자연의 능력이나 자연 자체를 말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혹은 우주의 원천적인 원리로서의 윤리적인 개념을 말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이 중에서 신적인 통치자로서의 개념과 우주의 원천적인 원리로서의 윤리적인 개념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天과 上宰를 비교해보면, 天이 더 비인격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天은 “섭리”(Providence)와 동의어로 신(神) 자체라기보다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그 영향력의 나타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上宰가 더 인격적인 신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희(朱熹) 같은 학자는, 天은 절대자로 인해 생겨난 열등한 존재의 보호의 문제와 연관될 때 쓰이는 반면, 上宰는 능력과 통치의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다고 주장하기도 하다.

이러한 신의 개념은 공자(孔子) 이전과 이후에도 계속 있었고 옛부터 도덕적인 사상이 다신론과 미신적인 형태와 함께 섞여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은 하나님이나 진리, 혹은 궁극적인 덕(德)의 이유를 찾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 자체를 강조하여 우주를 다스리는 세력과 어떻게 조화롭게 살며, 동료 인간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강조하였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정확히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공자는 초기 고전에 나타나 있는 신관에 수정을 가하거나 재해석을 하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이 신과 영들에 대한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하지 않고 저서에서도 많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공자의 소극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神)이해로 인해서 유교에서는 기독교에서와 같은 죄에 대한 개념을 찾을 수가 없다. 즉, 거룩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인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 죄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인 의무를 지지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한 때문으로 풀이될 수 있겠다. 그리고 범죄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불운과 역경 등의 형태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공자는 인간이 자력으로 완전할 수 있으며, 하늘과 땅과 같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로써 인간을 영화롭게 하고, 창조주와의 관계는 파괴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가 인간에 대해 현실적으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며, 유교와는 신관에 있어서 뿐만아니라 인간관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겠다. 공자의 사상 속에는 구원자가 개입할 여지를 남기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러한 차이점은 결정적인 것이다.4이상의 유교(儒敎)의 신관(神觀)에 관한 내용은 Leo SherIey-Price, Confucius And Christ, A Christian Estimate of Confucius (London: CameIot Press, 1951), pp.47-75에서 참조.

4. 기독교(基督敎)와 유교(儒敎)의 대화(對話)

마테오 리치의 저서들 중 절반 이상이 과학적인 분야의 것이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에 관한 것을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天主敎要, 二十五言, 十人詩編, 交友論, 天主實義 등은 모두 기독교적인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특별히 天主實義는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책으로서, 초기 유교에 근거를 두고 기독교적인 원리에 대해 종합적으로 설명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한 출판 연대는 알기 어려우나, 1591년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19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 오늘날도 대만이나, 일본이나 홍콩의 카톨릭 선교사들은 종교적인 훈련의 교재로 사용하기도 하는 대단히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의 상황화 작업을 집약시켜놓은 결정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가운데서 논의된 내용들이야말로 기독교와 유교의 첫 만남과 대화의 시도를 역사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겠다.

마테오 리치는 삼위일체나 다른 복잡한 개념들과 같은 기독교의 교리적인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중국인들에게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저작이 기독교의 모든 신비를 다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며 단순한 이성적 사고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원리들 만을 다루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은 반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가 기독교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많은 유교적인 용어와 개념들은 기독교를 중국의 전통 속에 맞추기 위한 노력의 탓으로 돌려질 수 있겠다.

결국 마테오 리치가 하나님의 사상이 유교의 고전에 명백히 나타난다고 믿었다는 것이 이같은 시도를 하게 했던 것이다.

주로 유럽에 있는 독자들을 위해 쓰여진 글들에서 리치는 고대 중국인들이 유일신 사상을 믿었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리치는 주(周)왕조가 섬긴 上宰가 실질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를 바 없음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조(明朝) 말기의 지식인들은 극심한 무신론에 빠져있다는 것을 그는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리치는 지존하신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만물을 지으시고 만유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돌보시며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元儒敎(Original Confucianism)의 신관이 기독교의 신관과 일치한다는 것은, 곧 자증적인(self-evident) 신존재론을 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은 천주실의에 나타난 마테오 리치의 의도가 신론의 확립에 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테오 리치는 上宰 및 天이라는 초기 유교의 개념들을 기독교의 하나님(Deus)과 동일시 하면서 天主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1715년 에 반포된 교황의 교서인 Ex illa die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그러나, 新儒敎(Neo-Confucianism)의 理(원리들)가 궁극적인 원리는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하므로써, 天의 개념과는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天主는 上宰와는 같은 개념으로 대용할 수 있는 반면, 新儒學者들이 말하는 이(理)의 사상에 대해서는 공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곧, 天主는 당시의 유학자들이 말하는 궁극적인 원리인 理(Principle-Ultimate)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理)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기타 사물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理)는 영혼과 지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혼과 지각을 산생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이 있는 사물이 영이 있는 사물을 산생하고 지각이 있는 사물이 지각이 있는 사물을 산생합니다. —–이(理)의 만물의 주재의 불가함은 이미 뚜렷하게 말한 대로입니다.5Encyclopedia Britannica Vol. 10, 16

이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리치는 하나님의 자존적인(self-existent) 본질을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自立, self-existent)과 의존하는 것(依賴, dependent)의 두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흰색의 말이 있다고 할 때 말은 흰색이 아니더라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이 없다면 흰색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은 자립(自立)적인 반면, 흰색은 의존(依存)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두가지 범주로 설명할 때, 신유교(新儒敎)의 이(理)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의존적인 영역에 속하는 반면, 天主는 창조주로서 자존하시는 분이으로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理)에 대한 공격과 관련되어, 리치는 기독교의 영과 신유교(新儒敎)의 기(氣)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곧, 우주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로 되어 있고, 우주의 창조자는 하나의 연속체 속에 있으며, 개체적인 존재는 이 연속체의 구성원이라는 이론이 결국 인간은 신(神)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神)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유교(新儒敎)의 사상 중 하나로 제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魂)이 증발되어 기(氣)의 일부가 된다고 하며, 음양(陰陽)이 가장 중요한 기(氣)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리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 반박하고 인간이 우주와 같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天主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리치가 기독교와 유교가 일치되어 불교와 도교에 대항해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유교(元儒敎)에 대한 말이며, 신유교(新儒敎)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리치는 유럽인들과 중국인들의 신관의 뿌리는 같다고 보면서, 중국인들은 고대에는 올바른 신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 잘못되어 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리치는 신관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사상에 있어서도 유교는 기독교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맹자(孟子)의 가르침을 좋아했는데, 그의 종교적인 교리는 적절하지 못했지만, 그의 도덕적인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특별히 그는 맹자의 성선설(成善說)에 동의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본성은 원래 그 자체가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정에 이끌림으로써 근본적인 선에 거슬림이 없을 것입니다. —–나의 인성으로써 선과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단, 인성을 원래 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악은 하나의 실체가 아닙니다. 선의 결핍을 말합니다.6lbid. P.135.

그러나, 맹자의 가르침이 공자로부터 나온 발전된 것으로서 뿌리는 같지만, 무흠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특별히 ‘불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자식이 없는 것이라’는 맹자의 효행론에 대해 결혼을 하지 않았던 예수회 신부로서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맹자의 가르침이 공자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리치는 오로지 공자(孔子) 만이 진정한 현자(賢者)이며 원유교(元儒敎)의 최고 대변자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공자가 완전하고 그의 가르침이 흠이 없다면, 중국인들이 그래도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리치는 이에 대해 간단히 대답한다. 공자는 비록 완전했지만, 하나님을 위해 준비하는 역할 만을 했으며, 그의 가르침이 중국의 도덕적인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오직 기독교 만이 이러한 필요를 채울 수가 있고, 공자에 의해 비롯된 사상들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현자(賢者)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그는 기독교를 유교보다 우위에 둔 것이다. 특별히 그는 天主의 사랑에 대해 강조하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천주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한 근본이 됨을 주장하였다.

천주를 위함이 바로 자기의 완성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은 오직 사람을 사랑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남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는 자신의 덕을 이루는 까닭에 외학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하는 인(仁)은 천주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함의 인(仁)입니다. —–

어진 사람은 천주를 사랑합니다.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도 사랑하고 아울러 다른 사람도 사랑합니다. 천주를 위할 줄 알면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압니다. 어째서 특별히 선한 자 만을 사랑합니까? 사람이 선을 사랑함은 그것은 천주의 선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7lbid. pp.142,148.

이와같이 리치는 세계관 뿐만 아니라, 윤리와 도덕적인 원리에 있어서도 기독교가 유교를 완성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리치는 기독교가 유교보다 더 완전한 종교라고 하면서도 유교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 의식과 관습을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특별히 조상에 대한 제사를 효행의 상징적이 표현으로 여겨 금지하지 않고 계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의 자세는 17세기와 18세기의 관례에 대한 논쟁(Rites Controversy)의 원인을 제공할 뿐만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상황화의 역사적인 예로서 토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충적인 태도는 결국, 리치가 하나님 자체에 대해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둔 것과 연결된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天主實義를 통해 볼 때 자신의 신앙에 대해 타협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인정할 수 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그의 관심사가 서구 개념을 그대로 번역해서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처음 천주에 대해 듣는 그들에게, 인격적으로 접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 듣지 않고서는 기독교에 대해 듣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5. 마테오 리치 상황화(狀況化)의 문제점(問題点)

이상에서 마테오 리치의 상황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그가 왜 그와 같은 상황화의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과 대한 역사적인 인과성과 그가 무엇을 전하고자 했느냐는 점에서 그 주된 교리적 관계에 대해 살펴본 셈이다. 이것은 다 그 상황화의 케이스에 대해 비판에 앞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여기에서는 역사적 인과성과 복음전달자의 동기 면에서의 순수성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복음의 전달을 위해서 여전히 문제는 문제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상황화 케이스의 문제점을 몇가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그는 신론에 강조점을 두어 그 개념에만 치우쳤기 때문에,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온전한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즉, 사도적 전통인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보전 노력보다는 하나의 교리를 위해 다른 부분에서 혼합하는 자세로 절충하였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결국 공자의 무흠성을 인정하고 원유교(元儒敎)를 기독교와 동일시 하는 오류를 낳는데, 계시의 절대성과 유일성보다 철학적인 분석과 해석을 무리한 연결작업을 전혀 성경적인 근거 없이 진행한 결과인 것이다. 구원관이 희박해질 때 온전한 신론을 세울 수 없음을 그는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인간론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고, 인간이 선과 악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있어서는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언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죄와 그 영향 아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도저히 의롭게 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이런 점에서 회개와 신앙의 성경적인 대안보다는 유교적인 기존의 비신앙적 관습과 의식을 개혁하려고 하지 않았다.

세째, 선교관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에 의지하기보다 과학기술과 학문적인 접목에 의존하므로써, 싸비에르의 방법론적인 경향을 그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중국인들에게 알기 쉽게 그들의 정서에 비위가 거슬리지 않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모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사실상 부인한 느낌을 준다.

또한 계속 논쟁적이고 철학적인 자세를 유지하므로써 복음 자체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학문적인 노력에 의존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네째,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십자가 사건과 부활 등 다른 종교와 유사점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성경적인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 부족하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 ‘사랑’, ‘빛’, ‘목자’,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보다는 철학적인 용어들이 더 많이 등장하고 있다.

다섯째, 비교종교학적으로 유교에 대해서는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강조하려고 하면서도 불교나 도교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는 중국의 상황에 타협하려했던 의도로 보인다.

여섯째, 공자의 가르침을 무흠한 것으로 보면서도 그가 성경적인 계시에 접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므로써 자연계시를 인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이성의 한계와 제한성을 간과한 셈이 된다.

일곱째, 당시의 유교적인 관습들 가운데 제사 의식은 공자(孔子)의 유교적 가르침이라기보다 미신적이고 무속적인 영향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단순히 의식으로 보고 허용했다는 것도 가능한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타협적인 자세로 보인다.

여덟째, 중국의 고전들이 上宰와 天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중국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은데 대해 마테오 리치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 중국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중 한 지파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아무런 성경적 근거나 역사적 근거는 없다.

이처럼 불확실한 부분에 대해서 자기나름대로의 주장을 하는 문제도 함께 지적되어야 한다고 본다.

결론(結論)

마테오 리치의 유교적인 전통 가운데서의 사역 정책은 개인적인 판단이라기보다 싸비에르 등 초기 예수회의 선교사들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사상적 중심국인 중국에서 예수회의 사역은 인도와 일본에서의 사역의 경험이 활용되어 나름대로 적응의 정책을 세운 다음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교의 신관은 사실상 개념만 존재할 뿐이고, 그 당시로서는 무신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현세주의에 빠져있었다. 따라서 원래의 유교의 가르침을 고전을 통해 이해하고 거기에서 적절한 개념을 발견했다는 것은 하나의 성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것도 용어만 그대로 사용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성경 만 가르치는 방식으로 하였으면 큰 무리가 없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마테오 리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원유교(元儒敎)의 신관을 기독교의 신관과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갔고, 따라서 온전한 복음을 전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적응이라는 관점에서는 성공하고 복음전파라는 점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평가는 그 당시 카톨릭교회 안에서도 프라시스칸과 도미니칸 등으로부터 있어온 것이다.

총체적 관점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상황화의 관점에서 볼 때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는 선교역사상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상황화의 노력을 다했다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선교지를 이해하고 그 문화에 대해 먼저 배우고자 하는 노력, 또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과학기술의 전수를 활용하는 것 등에서는 대단히 진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해 및 참고문헌

  • 주해
  • 1. 이상 마테오 리치의 행적(行蹟)에 관한 부분. EncycIopedia Britannica. Vol.10. pp.39-40. 에서 인용.
  • 2. Ibid. Vol.16. P.356.
  • 3. 이상의 내용 중 프란시스 싸비에르의 행적에 관하여 John D. Young,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the First Encounter (Hong Kong : Hong Kong Univ. Press, 1983), pp.12-22에서 주로 참조.
  • 4. 이상의 유교(儒敎)의 신관(神觀)에 관한 내용은 Leo SherIey-Price, Confucius And Christ, A Christian Estimate of Confucius (London: CameIot Press, 1951), pp.47-75에서 참조.
  • 5.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天主實義) (이수웅 역, 경북 왜관:분도출판사, 1984) pp.36,40.
  • 6. lbid. P.135.
  • 7. lbid. pp.142,148.
  • 참고문헌
  • 1. Young, John D.,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the First Encounter. Hong Kong Univ, Press. 1983.
  • 2. Sherley-price, Leo, Confucius and Christ, a Christian Estimate of Confucius. Dacre Press, London 1951.
  • 3. Bong Rin Ro., Co Ed. The Bible and Theology in Asian Context. (ATA/AETEZX, 1984) Eshnauer Ruth
  • 4. Bong Rin Ro., Co Ed, God in Asian Contexts, ATA 1988 Albrecht, Mark C.
  • 5. Encyclopedia Britannica Vol. 10, 16
  • 6.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이수웅 역, 분도출판사, 경북왜관. 1984
  • 7. 예수회 국제교육사도직 국제위원회, 박홍 옮김, 예수회 교육의 특성, 성바오로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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