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연구: 독립국가 연합 III – 코카서스 지역

현대선교4 (Current Mission Trends). 발행 : 1993년 8월 25일, 서울:GMF Press. 수록면 : 63-88.

문상철
한국선교정보연구센터 연구원

코카서스 개관

지리, 지형

코카서스 지역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지역으로 인종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역이다.

이곳은 50개 이상의 종족집단들이 밀집해 있는 인종의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이중 33개 종족집단이 코카서스 언어집단에 속하지만, 이 종족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말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코카서스 지역에는 같은 규모의 세계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언어집단과 종족집단들이 있다.

코카서스의 종족들은 언어 뿐만 아니라, 문화와 종교 면에서도 다른 점들을 가지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서로 가까우면서도, 문화적으로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바로 코카서스이다.

흔히 북부 지역을 시스코카시아(Ciscaucasia)라고 부르고, 남부 지역을 트랜스코카시아(Transcaucasia라)  고 부른다. 전체 면적은 440,000  평방 킬로미터인대, 대개 산악지대이다.

기후적으로 온대와 아열대 기후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형적안 영향으로 북쪽의 차가운 공기가 남쪽으로 이동하는가 하면, 남쪽의 따뜻한 공기가 북쪽으로 몰려가기도 한다. 또한 서쪽에서는 온화한 대륙성 스탭 기후가 펼쳐지고, 동쪽에서는 대륙성의 건조한 준사막성 기후가 전개된다.

대체로 산악 지대에는 인근의 평지보다는 많은 비가 내린다. 특별히 아르메니아의 고원지대는 다른 지역보다 더 대륙성 기후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정월에는 영하 12도까지 떨어지며, 7월에는 18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코카서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북으로 뻗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은 이곳이 오토만 투르크와 이란의 오랜 경쟁 관계에 이어 러시아가 진출하는 변천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종집단들은 점점더 산악지대로 숨게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래서 이 지역에 50개 이상의 종족집단들이 ‘있지만, 북부 코카서스에는 슬라빅어를 말하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 인구가 전체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산악 부족들의 저항은 완강하여서, 러시아는 오랫동안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여 난처한 지경에 빠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가 소아시아로 진출하는데 상당히 차질을 빗게 되었던것이다. 이들의 강한 독립성향으로 인해서 1917년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트랜스코카서스는 하나의 연방 공화국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이내 분열된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한 지역은 흑해 연안이다.

소비에트 정권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나 중·경공업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산업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시골 지역에는 인구가 산만하게 분산되어 있다. 코카서스 산맥의 고지대에서는 가축를 치고, 산악 농작물을 재배하고, 수공예품 등을 만들고 있다.

특별히 트랜스코카서스의 산악지대는 100세 이상의 장수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인데, 아제르바이잔에만도 100세 이상 고령자 2,500명 이상이 목동, 원예사, 카펫 수공자로서 활동적으로 일하고 있다.

기독교 현황

기독교가 코카서스지역에 처음 소개된 것은 3세기 때이다. 그 이후 남쪽의 아르메니아와 북부의 그루지야는 여러번의 공격을 잘 견디어내고 신앙을 지켜왔다. 아르메니아 카톨릭교와 그루지야의 정교가 기독교신앙의 전통을 지켜온 것이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에는 복음적인 침례교와 오순절 교회들이 활발히 성장하고 있기도 하다. 아르메니아의 어느 오순절 계통의 개척 교회는 지난 5년 동안 2,000명 이상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기도 했다. 복음적인 아르메니아인들과 그루지야인들은 선교에 적극적이어서 그들의 동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런가하면 위의 두 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코카서스 사람들은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와 이슬람 공화국들 사이의 전쟁과 그 갈등으로 인해 무슬림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못했다. 수세기 동안 이 종족들을 위한 선교 사업이나 성경번역 작업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코카서스의 복음적인 교회들 사이에 선교에 초점을 맞춘 종교적인 자각이 일고 있다는·것이다. 젊은 신자들이 자민족을 위한 전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집단을 위한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같은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서양 교회들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이들이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전도하려고 하는 종족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대중 매체도 이들의 선교 사업을 위해서는 대단히 효과적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는 타문화 선교 훈련이 필요하다.

VI. 아르메니아 공화국

개관

  • * 국명: 아르메니아 공화국(Armenians)
  • * 인구
    • 공화국 인구 : 3,376,00Q(l991)
    • 종족 인구 : 3,559,151(1970), 4,151,241(1979), 4,627,227(1989).
    • 해외 인구 : 1.7- 2백만 명(미국 등 60개국에 홑어져 있음).
    • 종족 인구 증가율 : 16.6%(’70-’79), 11.5%(’79-’89).
  • * 면적: 29,800 평방 킬로미터(구소련 공화국들 중 가장 작음/ 구소련 전체 면적의 0.13%에 불과)
  • * 수도: 예레반(Yerevan)       .
  • * 언어: 아르메니아어(인도-독일계 언어군), 90.7%가 공용어를 쓰며, 38.6%가 러시아어를 제 2언어로 사용.
  • * 종교: 기독교/아르메니아 카톨릭
  • * 복음적인 그리스도인: 수천명(USCWM의 1989년 보고서는 코카서스 전역에 10,000명에서 12,000명의 복음직인 그리스도인들이 등록되어 있으며, 전체 인구 중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인구의 1퍼센트가 좀 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 * 성경번역 현황: 1978년 성경 전권이 번역되어 성경번역연구원 (Institute for Bible Translation)에 의해 발행되었음. 1986년에 어린이 성경이 출판됨.
  • * 인구 구성비: 아르메니아인-90%, 아제르인-6%, 기타-1%

지형/기후

아르메니아는 아열대의 북부 내륙 깊이 위치한데다, 높은 산악지대에 둘려 쌓여 있기 때문에 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띠고 있다.

연중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날들이 많으며, 고원지대를 제외하고는 여름이 길고, 뜨거워서 평지의 6월과 8월의 평균 기온은 25도 정도이지만, 42도 정도로까지 올라갈 때도 있다. 겨울은 일반적으로 춥지가 않으며, 평지와 낮은 산악지대의 기온은 영하 5도 정도인데 반해서 산악지대에서는 영하 12도 정도이다.

산악 지대의 연중 강우량은 8,000 밀리미터 정도이지만, 내륙의 평지와 분지에서는  2,000  내지 4,000 밀리미터정도의 비가 내린다. 수면은 봄에 눈이 녹을 때나 가을에 비가 내릴 때 가장 높다. 고도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더러 큰 하천에는 엄청난 수력발전의 잠재력이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는 온천과 우물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의료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다른 곳보다 중요한 지역은 아라랏 평원과 그 주위의 산들이다. 이곳은 인구밀도가 높고, 매우 번창하는 곳으로서 전통적으로 정부 기관들이 자리 잡은 곳이다. 그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은 남동부와 북동부에 있는 강 유역이다.

아르메니아의 인구 분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공화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으로 말미암은 도시화에 기인한 것이다. 20세기말 아르메니아의 도시인구는 전체 인구의 2/3 정도가 되고 있다.

경제/산업

아르메니아는 농업적인 요소를 가진채 산업화된 나라이다. 아르메니아의 산업의 비율은 1913 년에 14 퍼센트였으나, 1970 년에는 73 퍼센트에 달했다. 산업의 다양화, 농업의 재건설, 수송의 발달 등을 가능케 한 급격한 경제 발전은 구소련의 연방 차원에서의 재정 투자에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아르메니아는 구소련의 연방 체제에서 화학, 비철금속, 기계, 장치, 정밀기계, 직물, 봉제, 포도주, 브랜지, 통조림 등의 주요한 공급지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확고한 중공업 중심체제에서 경공업이 또한 상당히 발전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또한 1960 년대에 열발전소들이 건설되기 시작해서 10년 만에 공화국 내의 전기 소요량은 이것으로 충족되었다.

예레반, 레니나칸, 키로바칸은 기계 생산 도시들이며, 화학 산업은 예레반, 키로바칸, 아라베르디에 집중되어 있다. 비철금속으로는 구리 정제 및 정련,·몰리브덴 등과 같은 광석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특히 예레반은 가장 발전된 산업기지인데, 공화국 내에서의 전체 산업 생산량의 3/5을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다른 산업 기지들은 북부에 건설되어 왔는데, 레니나칸과 키로바칸 등은 주요한 산업의 중심지이다. 도로망은 예레반이 중심이 되어 다른 교통 수단에 비해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국내 항공선은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

산업이 아르메니아 경제의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여전히 농업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도 인구의 거의 절반 정도가 농업에 직,간접 종사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국토 중 경작 가능한 땅은 많지가 않아서 밭이나, 과수원이나, 포도원과 같이 경작된 땅은 전체 공화국 면적의 20 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작 가능한 땅의 절반 이상은 관개가 되었다.

고산지대의 평원은 동물들의 사육장이 되고 있는데, 이곳은 소와 젖소와 양들이 자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아울러 돼지를 비롯한 여러 가축들을 기르기도 하는 것이다

종족

아르메니아인들은 노아의 아들 중의 하나인 야벳의 직계 자손들이며, 고고학적인 발견을 통해 아라랏 산 주변에는 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와같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족 중의 하나이다.

정치

1920년에 공화국이 결성되었고, 구소련 붕괴 후 독립국 연합 소속의 공화국으로 독립되어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자치 지구 문제로 아제르바이잔과의 충돌이 중요한 정치 문제가 되어 왔다. 다른 구소련의 공화국과들과는 달리 내부적인 소수민족들 간의 갈등은 없는데, 그것은 인구의 90 퍼센트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 및 터어키와 오래된 원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18년 100만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어키군대에 의해 학살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구소련 붕괴 이후 범투르크 노선을 표방하는 터어키는 지난해 말 100명 이상의 고급 장교들을 아제르바이잔의 군사 고문으로 파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가운대 서방은 석유 등 아제르바이잔과의 경제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적극적으로 아르메니아를 지원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아르메니아에는 1988년 12월의 대지진으로 인한 이재민 200,000명,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으로 인한 난민 360,000을 합쳐 약 600,000명의 난민들이 있다. 그리고 행정 구역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이지만, 카라바흐 지역에 아르메니아인 150,000 명 이상이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

  • 인구 1만명 당 의사 수: 28.7(1970), 34.8(1980), 39.9(1988) 명
  • 중급의료요원 수: 69.9(1970),  81.0(1980), 97.1(1988) 명

1988년 12월 7일 오전 11:41 역사상 가장 비참한 지진이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북부 지방을 관통했다. 이 지진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지방은 스피타크라는 곳인데, 이 지역의 한 세대(generation)가 그대로 없어져 버렸다. 이때 진원지 반경 30마일의 충격으로 이충 이상의 건물은 모두 무너졌던 것이다.

그 밖에도 스테파나반, 레니나칸, 스피탁, 키로바칸 등과 같은 도시들에도 죽음이 엄습했다.

역사

아르메니아인들은 고대 문화의 유서깊은 전통을 가진 민족이다. 기원전 1세기 때 아르메니아 제국은 현재의 시리아와 레바논까지도 포함하였다. 이러한 문화적인 전통은 다양한 외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의 삶의 양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특별히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는 이 전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아르메니아가 처음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2세기 때에 시리아를 통해서였다. 전설에 따르면 바돌로매와 다대오가 이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어쨌든 A.D. 310년에 기독교는 아르메니아의 공식 국교가 되었으며, A.D. 506년부터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는 독립적인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는 구소련 공화국 중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공화국이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인이라는 말은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의 신자로 통할 정도로 아르메니아인들의 종교적인 응집력은 대단히 강하다.

일찌기 아르메니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했던 페르시아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더 결속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강한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날 전체 인구의 75 퍼센트 정도가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아르메니아 제국은 오토만제국과 페르시아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약해졌으며, 1639년에 분할되어 터어키와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1915년에 터어키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학살당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터어키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크게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기독교 전통을 지켰다. 이와같이 아랍, 페르시아, 투르크 및 다른 민족들의 침략을 받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수많은 종교들이 강요되었지만,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전통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은 아르메니아는 1828년에 재정 러시아에 의해 다시금 정복되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서유럽의 자유분방한 사상을 접하면서 19세기에 문화적인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1918년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으로 트랜스코카시아 연방 공화국이 형성되지만, 이 세 공화국의 근원적인 차이점으로 인해서 1918년 5월 26일 각자 독립 국가로 분리되었다. 이렇게 아르메니아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중세 이후 참으로 오랜 만에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도 잠깐, 이내 1920년에 볼셰비키 세력에 의해 다시 통치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20세기 초에 외국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생겨났댜 그래서 침례교와 오순절 교회들은 활발히 신도 수를 늘리고 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1914- 1918) 핵심 기독교 세력들이 오토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래서 미국 등 해외에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미국에 있는 아르메니아 교회들은 대개 복음적인 교회로 알려져 있다.

문화

그들은 그들의 고대 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르메니아어로 된 문학은 5세기부터 시작되었고, 수도원이 지적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대개 역사성을 띤 것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16- 18세기에는 대중적인 음악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연가들은 오늘날에도 불리어지고 있다. 19세기 들어와서는 풍자적인 작가들, 사실주의적인 단편 소설과 희극 등이 아르메니아 문학의 맥을 잇고 있다.

음악가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사람들이 더러 있기도 하다. 아르메니아의 방송 체제는 1926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예레반 텔레비젼은 1956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라디오와 텔레비젼 방송사들은 아르메니아어, 러시아어, 아제르바이잔어, 그리고 쿠르드어로 방송하고 있다.

선교 상황

과거에는 2- 3백만 명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신자들을 위해서 교회 건물은 수십개 밖에 없었고, 교역자도 200명 이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아르메니아의 주요 부락마다 은사주의적인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기도 제목

  1. 아르메니아어로 된 성경의 배포를 위해
  2. 아르메니아에 있는 복음적인 교회들의 노력이 열매를 맺도록
  3. 복음에 대해 보다 더 개방적인 젊은 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4.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흥이 일어나도록
  5. Trans-World Radio에 의한 아르메니아어 라디오 방송 사역을 위해

VII.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개관

  • * 국명: 아제르바이잔 공화국(Azerbaijanis)
  • * 인구
    • 공화국 인구: 7,136,600(1991)
    • 구소련 내 종족 인구: 4,379,937(1970), 5,477,330(1979), 6,791,106(1989)
    • 종족 인구 증가율: 25.1%(’70-’79), 34.0%(’79-’89)
    • 전체 인구: 1,500백만 명(구소련,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서유럽 등)
  • * 면적: 86,600 평방 킬로미터(스리랑카보다 크고, 포르투갈, 오스트리아와 비슷한 규모)
  • * 수도: 바쿠(인구 200만, 구소련의 도시들 중 다섯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 1800년대 중반 ‘‘금은 황금“인 석유의 발견과 함께 발전해서 카스피해 최고의 항구 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 언어: 아제리 투르크어(투르크어군)
    • 인구의 97.9%가 아제리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29.5%가 러시아어를 제 2언어로 사용함.
  • * 종교
    • 이슬람(시아파 중심), 인접한 이란으로부터 영향을 받음.
    • 그러나 아브크하지안, 오세티안, 키르카시안, 체첸-인구쉬 및 카라차이­ 발카르를 비롯해서 다게스탄의 종족들은 대부분 수니 무슬림들이다. 원래 이란의 일부였던 아제르바이잔은 마술과 불의 숭배자들의 요새로 알려진 곳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이곳에는 기름이 났고, 석유와 가스전을 태우는 불꽃을 다스리기 위해 이교도의 신전들이 세워졌다. 불을 의미하는 ‘아제르’라는 말은 이러한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 * 복음적인 그리스도인: 알려지지 않음.
  • * 성경번역/배포현황 :
    • 1893년에 성경 전권이 아제리 터어키어로 출간된 후, 1982년 아제리어로 신약성경이 새롭게 번역되어 성경번역연구원(Institute for Bible Translation)에 의해 발행되었음. 1986년 어린이 성경이 출판됨.
      1991년 4월에 터어키의 성서공회가 아제르바이잔의 서적 전시회에 참가하라는 초청을 받고 참석했다. 이때 터어키 성서공회 관계자들은 많은 아제르인들이 터어키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전시회 첫날 신약성경 300권, 어린이용 그림 성경 300권, 시편 10권을 나누어 주어서 그 다음날부터는 성경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나누어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시회 기간 중에 아제르바이잔의 국회의원 한명, 언론인 두명, 대학 교수 5명이 성경을 얻어가기도 했는데, 전체적으로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바쿠에 다시 오라는 말을 인사로 했다.
      그리고 전시회가 끝난 다음 터어키성서공회는 침례교와 러시아정교회로부터 러시아 성경 5,000부, 터어키어 성경 1,000부, 터어키어 신약성경 1,000부(구판)아제리 신약성경 1,000부, 러시아어 어린이 성경 5,000부를 주문받았다고  한다. 이 밖에 침례교에서는 쪽복음을 3,000부 주문하기도 했다.
  • * 인구 구성비: 아제르인- 78%, 아르메니아인- 8%, 러시아인- 8%, 기타- 6%(쿠르드,  시리아인 등)

지형/기후

코카서스 공화국들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더 남쪽으로 가면 이란의 아제르바이잔 구역이 있고, 동쪽으로 가면 카스피해가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함께 20세기의 아제르바이잔은 전통과 현대를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다. 외진 곳에서 꼿꼿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산업화의 단맛을 본 사람들이 도시를 이루고 발전소를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는데, 땅을 일구는 대신 다양한 산업의 기회들을 타고 아제르바이잔은 20세기 초에 이미 세계에서 앞선 생산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지형의 특이점은 경치의 다양성이다. 영토의 40퍼센트 이상이 저지대이며, 영토의 절반 정도가 400에서 1,500미터 사이에 위치해 있고, 1,500미터 이상은 전체 영토의 10퍼센트가 약간 넘을 뿐이다.

산악 지대는 너도밤나무, 참나무,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코카서스 사슴, 수돼지, 곰, 삵괭이 등의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다. 나무들로는 스텝, 혹은 준사막성과 회색 토양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코라와 아라스 강 사이에 운하를 잘 개발해서 저지대는 대부분 관개가 되고 있다.

중부 및 동부 아제르바이잔의 건조한 아열대 기후의 겨울은 온화하고 길며(4-5 개월), 여름은 매우 더위서 평균 기온이 27도, 높게는 43도까지 올라간다. 특별히 낙히체반 지역의 건조한 사막성 기후는 겨울에는 춥고 건조한 반면, 여름은 몹시 덥다.

그 밖에 다른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기후는 온화한데다 건조하거나 습한 기후이다. 3,000 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의 툰드라 지역은 서리와 눈 때문에 일년에 서너달은 접근할 수 없다.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아제르바이잔의 지형 중에서 특이한 곳은, 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있지만 사실상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와 아르메니아에 둘러쌓인 아제리안들의 지역인 낙히체반(Nakhich evan)이다.

낙히체반 지역은 거의가 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살고,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그 반대이다. 나고르노­ 카라박 자치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지역인데, 이곳에서는 100세 이상의 고령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지역들은 원래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분쟁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이 지역들은 오히려 오랜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곳에서의 분쟁은 지난 5년간 2,000명 이상의 인명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특별히 4,400 평방 킬로미터의 카라바흐에 사는 주민 약 200,000 명 중 80 내지 90 퍼센트는 아르메니아인이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카라바흐 문제에 대한 군중 집회가 열리면서 고르바쵸프의 개혁 정권의 기반을 흔드는 소요가 일어났다. 이때 구소련의 신문들은 ‘‘카라바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시범 케이스”라는 제호를 달았다. 오늘날에도 그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고토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1991년 12월 카라바흐 주민들의 투표 결과는, 80 퍼센트가 투표에 참가해서, 투표 참가자의 99퍼센트가 아제르바이잔으로 부터의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로부터 3주 후에 아제르바이잔 국민들을 대상으로 카라바흐 문제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을 때 카라바흐는 이 투표 자체를 보이코트했다.

한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소속된 독립국가연합(CSI), 국제연합(UN), 유럽안전협력회의(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등은 외부의 힘으로 현재의 국경선에 변경을 가할 수 없다는 결의를 했다.

구소련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던 1991년 9월에 러시아와 카자흐 공화국의 대통령은 두 진영을 설득해서 살상을 그만두고 타협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를 인정하는 대신 아르메니아가 영유권을 주장하지는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이제 그 문제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아르메니아와 카라바흐 사이의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가 지나치게 아르메니아에 동조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독립국연합의 관리들을 실은 헬리콥터가 포격을 맞아 추락한 사건이 터지자 러시아-카자흐 간의 합의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아제르바이잔은 이것을 아르메니아 군부의 도발로 의심하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권을 폐지하는 등의 보복 조치를 하였다.

이런 분쟁의 와중에서 독립국연합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구소련의 붕괴 이후 군사적인 문제들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아제르바이잔은 군대를 보내 영유권 확보에 나섰고, 나고르노-카라바흐는 1992 년 1월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은 물론 아르메니아도 이 지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수입하는 물자의 80퍼센트를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수송해야 하는 아르메니아에서는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특별히 지난 겨울 아제르바이잔의 석유, 천연 가스, 원자재에 대한 적극적인 봉쇄는 아르메니아의 산업을 마비시키면서 아르메니아를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의 중재도 양측 입장을 조정하지는 못했다.

1993년에 들어와서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에 대공세를 취하였다.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권 수호 노력은 아르메니아와 카라바흐의 통로 확보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더욱 공격적으로 되어,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4,000 평방 킬로미터를 차지한데 이어, 마침내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10 퍼센트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투의 와중에 많은 아제리인들이 아르메니아 군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아제리 군인들이 전투의 초반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탱크 등의 장비들을 버리고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UN의 난민 대책 위원에 따르면, 이 전쟁으로 인해 수십 킬로미터의 피난길에 소진되어 많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죽었으며, 동상에 걸려 죽어가는 아이들을 차마 보다 못한 여덟명의 부녀자들이 자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편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켈바자르 역에 대한 아르메니아 군대의 침략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점령한 아제르 영토의 반환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또한 두 전쟁 당사국은 러시아가 상대편 국가를 돕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특별히 아제리 국방장관은 러시아 장교들과 아르메니아 군인들 사이의 라디오 교신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인 터어키가 같은 무슬림이면서도 투르크 혈통인 아제르바이잔 편에 서서 이 분쟁에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수명의 터어키 장교들이 아제르 군대의 자문관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아제리 관리들과 서방 외교관들은 아직까지 그 이상의 지원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서의 아르메니아의 작전이 과연 카라바흐에 대한 통로 확보 차원이냐, 아니면 장래의 협상에 대비해서 많은 영토롤 선점하려는 의도인지에 아직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어떤 면에서 전쟁 자체보다, 내정의 불안을 더 우려해왔다. 사실 엘치베이 정권은 대아르메니아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한 바탕 위에 탄생한 정권이었으며,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자 이 정권은 갑자기 붕괴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93년 6월말 엘치베이 총리 하에서 부총리를 지내다가 양모사업으로 축적해두었던 부에 바탕을 두어 사병을 조직해서 엘치베이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구세이노프가 엘치베이를 몰아내고, 의회에 의해 국방, 내무, 보안 장관을 겸하는 총리직에 추대된 것이다.

과거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국민 영웅’의 칭호를 받았던 34세의 구세이노프는 경제 전문가이자 군사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데, 아제르바이잔 국민들은 그가 도탄에 빠진 경제를 구하고, 패전 직전의 대아르메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3,000 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백만명을 이동시켰던 이 전쟁은 어디로 같 것인가? 양쪽의 극단주의자들은 마음을 열고 있지 않지만, 서방 외교관들은, 양 정부가 비공식적으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자치권을 회복시키는 선에서의 타협안을 받아들일 뜻을 밝힌 점으로 미루어, 이 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한편 1992년 5월의 연합성서공회(UBS)의 세계 보고에 의하면, 문제의 나고르노-카라박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서 성경이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종족

원래 그루지야(죠지아)와 같이 코카서스 계통의 민족인데, 언어적으로는 투르크족과 연결된다. 특별히 11세기의 셀죽크 제국 통치기에 몰려운 투르크족들이 이란족 및 고대로부터 코카서스에 살았던 다른 종족들과 함께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살게 되었다.

가장 큰 종족집단은 아제리 투르크(아제르바이잔인)로서 4.7백만 명으로서 트랜스코카서스에서는 가장 숫자가 많은 집단이다.

정치

1917년 독립 국가가 되었지만, 터어키와 영국의 통치를 받은 적이 있으며, 1920년에 공화국이 되어 1922년에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와 함께 트랜스코카서스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연방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936년에 현재의 세 공화국으로 나누어짐.

아제르바이잔은 다른 무슬림 공화국들보다 더 서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동안 아제르바이잔은 경제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에 비해 정치적인 안정을 이룩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에는 터어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다. 터어키의 텔레비젼 방송이 두개 채널을 통해 전해지고 있고, 바쿠와 이스탄불을 비롯한 터어키의 주요 도시로 매주 여러 편의 비행기가 운항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제르바이잔의 곳곳에서 가게의 간판들은 시릴체제나 이란의 아랍어 글자보다는 터어키어의 라틴 문자를 선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 정권은 친(親)터어키 노선을 띠지만, 터어키를 중심으로 한 투르크권의 단합을 추구하는 범(凡)터어키노선을 표방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아제르바이잔은 아시아의 한가운데에 고립된 지정학적 위치를 잊지 않고 있다. 이란이 인접해 있고, 낙히체반 지구가 터어키에 닿아있기는 하지만, 아제르바이잔 본토는 터어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형편 때문에 이란이 또한 아제르바이잔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들은 모스크를 짓고, 서점을 열고, 열심히 의교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산업

아제르바이잔은 산업과 농업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산업 생산 쪽으로 이미 경제의 무게 중심이 기운지가 오래됐다. 이 중에서도 중공업에 비중을 둠으로써 석유와 천연가스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기계와 전기 및 음식 산업 등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특별히 석유 산업은 20세기 초에 이미 세계에서 선두를 달리는 석유 생산국으로서 정제 산업의 요람이 되었다. 1901년의 자료를 보면, 11,400,000톤의 석유를 생산해서 미국보다 생산량이 많았으며, 러시아의 95퍼센트, 세계의 50퍼센트를 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소련과 세계의 곳곳에서 석유개발이 진행되면서 아제르바이잔이 점했던 비중은 점점 더 약해졌다.

그 밖에 아제르바이잔에는 가스, 납, 아연, 찰 구리, 알루미늄의 원료인 섬장암 등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전력의 90퍼센트는 열병합 발전소에서 생산되어서 공화국 전역에 보급되고 있다.

경공업으로는 면, 양모, 직물, 편직, 전통 공예, 기타 소비재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이 구소련 내에서 차지했던 생산량의 비중은 20세기 말에 와서 현저하게 증가했다. 주요한 산업 도시로는 셰키, 스테파나케르트, 키로바바드, 민게차우르, 바쿠 등이 있다. 식료품업은 공화국의 전역에 흩어져 있다.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7퍼센트 만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이지만, 구소련의 농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만큼 농업이 발달했다. 면화가 가장 중요한 농작물이라면, 담배가 두번째요, 포도도 대단히 중요하다. 특별히 셰키, 자카탈리, 게오크차이 등의 지역에서는 견직이 되고 있다.

또한 어업은 카스피해에 철갑상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특별히 카스피해의 해안에 있는 아프세론은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건조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취화 요오드수, 석회암 등이 풍부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도 바쿠, 숨가이트 등과 같은 도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산업화가 많이 되고,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들이기도 하다.

바쿠는 특별히 석유 산업으로 인해 그처럼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구소련의 도시들 가운데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도시로 인정받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강들은 대부분 배가 다닐 수 없어서, 대부분의 화물들이 철로를 통해 수송된다. 그리고 철도의 상당 부분이 전기화되었다. 수송하는 물건들은 석유 생산물, 건축 재료, 목재, 포도 등이다. 아울러 공화국 내에서는 자동차를 통한 수송이 보편화되고 있다. 지방울 연결하는 고속도로들이 주요 지역을 연결하고 있기도 하다.

사회

  • 인구 1만명당 의사 수: 25.0(1970), 33.4(1980), 39.3(1988)
  • 중급 의료요원 수: 76.0(1970), 84.3(1980), 97.4(1988)

역사

원래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죠지아와 같이 크리스챤들이었으나, 8세기와 10세기 사이에 아랍의 칼리프들의 통치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8세기 때까지만 해도 이란계가 거주민의 다수를 차지했으나, 9세기에 들어와서 투르크화되었다. 그 이후로 아제르바이잔의 전통과 관습 속에는 이슬람의 영향이 크게 미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갈등은 수많은 문제들을 일으켰으며, 해결책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두 공화국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붉은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와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에레반에 진주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압박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그 공화국에 있는 소수파를 보호하라는 해방자의 역할을 하는 임무를 띠었던 것이다.

그 군대들은 특별히 아제르바이잔에 있는 아르메니아 소수만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를 못했다. 연방 정부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지방 경찰국들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대학살을 방치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8년 11월과 12월 아제르바이잔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집 최소한 750채를 일시에 파괴하는 폭력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안드레이 사하로프은 키로보바드에서만도 138의 아르메이나인들이 살해되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 폭력 시위대들은 이슬람을 상징하는 녹색기와 호메이니의 초상화를 앞세우면서 시위를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Armenian Apostolic Church)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회교 사이의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는 수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로 탈출해왔다.

아제르바이잔은 언어 계보상으로는 투르크족과 연관이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이란과 밀집한 관련이 있다. 이란은 매일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로 이슬람 선전 방송을 내보내 왔다. 이 선전은 과거 소련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왔다.

문화

긴 역사를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저명한 사상가, 시인, 과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감정이 풍부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고대 음악의 전통을 풍부하게 보존해오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노래이고, 노래는 또한 춤이다.

소비에트 기간 동안 문맹이 퇴치되고, 고등 교육 기관, 연구소 등과 함께 극장 등이 세워졌다. 오페라와 발레가 널리 보급되었다. 바쿠에는 라디오 방송국과 텔레비젼 방송국과 영화 촬영장 등이 있다.

선교 상황

매주 이란과 구소련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위한 아제리어 방송이 전파를 타고 있다. 그리고 구소련의 붕괴 이후 선교사들이 진출해서 은밀하게 사역하고 있다.

기도 제목

  1. 구소련과 해외의 아제리인들에게 신약성경이 원활히 배포되도록,
  2. 아제리-투르크어로 성경번역을 끝낼 수 있도록,
  3. 아제르바이잔 내의 러시아어를 말하는 복음적인 회중이 선교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4. 서유럽에 살고 있는 아제리인들에게 전도할 수 있도록

VIII. 그루지야 공화국

개관

  • * 국명: 그루지야 혹은 죠지아 공화국(Georgians)
  • * 인구
    • 공화국 인구: 5,454,200(1991)
    • 종족 인구: 3,245,300(1970), 3,570,504(1979), 3,983,115(1989)
    • 종족 인구 증가율: 10.0%(’70-’79), 11.6%(’79-’89)
    • · 구소련 공화국들 중 인구 밀도가 높은 편에 속함. 소련 연방에 편입된 이후에 그루지야의 인구는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골 사람이라고 알려진 인구의 상당수가 인근 도시의 경제권에 편입되어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
  • * 면적: 69,700 평방 킬로미터(구소련 연방 중 10번째 크기)
  • * 수도: 트빌리시(Tbilissi)
  • * 언어: 그루지야 어(코카서스 언어군)
    • 인구의 98.3%가 공용어를 사용하며, 26.7%가 러시아어를 제 2언어로 사용함.
  • * 종교: 기독교/그루지아 정교(다수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임. 복음적인 교회는 약간의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음)
  • * 복음적인 그리스도인: 수천명
  • * 성경번역 현황: 1985년에 신약성경이 새롭게 번역되어 성경번역연구원(Institute for Bible Translation)에 의해 발행되었음.
  • * 인구 구성비: 그루지아인-69%, 아르메니아인-9%, 러시아인-8%, 기타 -14%.

지형/기후

콜크히데의 비옥한 평야를 제의하고는 그루지야의 국토는 대개가 산악지대이며(85%), 전체 국토의 1/3이 삼림이나 숲으로 덮여 있댜 북쪽으로는 거대한 코카서스 산맥이 있어서 평행으로 여러 산줄기가 이어져 동쪽으로 길게 뻗어내리는가 하면, 깊고, 험한 골짜기에 의해 나누어지기도 한다.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은 두번째 줄기와 합쳐져서, 무너져 내린 듯한 저지대로 연결된다. 죠지아 영토의 남반부에는 소코카서스의 평원이 두드러지지만, 습기가 많은 좁은 해안의 평원을 지나면 3,301미터의 디디-아불리의 정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동부에서는 상대적으로 숲이 적고, 스텝은 엉겅퀴류의 나지막한 풀과 깃털 모양의 부드러운 풀들이 깔려 있다.

인구의 90퍼센트 정도가 1, 000미터 이하의 저지대에 살고 있으며, 인구 밀도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갑자기 높아진다.

동부 그루지야의 기후가 약간 습한 기후에서 건조한 아열대 기후로 변화가 있다면, 서부 그루지야에는 습한 아열대의 해상 기후가 전개된다. 특히 서부 그루지야에는 연중 강우량이 1,000에서 2,000밀리미터에달하며, 가을과 겨울에는 최고조에 달한다. 동부의 평지와 낮은 산악지대에서는 바다에서 떨어진 거리에 따라 400에서 700밀리미터의 비가 내린다. 그러나 산에서는 강우량이 두배 정도 더 많아진다.

종족

전체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과 오세테스, 그리크스, 아브카즈 등 그들의 고유한 고대언어와 문화를 지닌채 코카서스의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50개 이상의 종족들이 있다.

그루지야인들은 유서 깊은 고대 문화를 가진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들의 기원은 한 때 트랜스코카서스에 살았던 카르티 부족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루지아인들의 왕국인 이베리아는 기원전 3세기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역사를 통해 그들은 외부인에 대한 환대, 생명에 대한 사랑, 활발한 지성, 유머 감각 뿐만 아니라 전사들로 알려져 있다. 신체적으로는 보통보다 키가 크며, 외모는 머리 색깔에서부터 발끝까지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머리색은 짙다. 눈은 푸르거나 회색인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 엷은 갈색이다. 코의 모양도 천차만별인데, 동부에서는 메부리코가 많은 반면, 서부에서는 곧고 가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외모에 대한 기준은 높은데, 그루지야 여인들은 전설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오토만 술탄과 이란의 왕들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그루지야인들도 장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민족주의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1990년 3월에 그루지야 의회는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을 선언했다. 정치 세력들로는, 주요 세력인 ‘자유그루지아회의'(Free Georgia Round Table), ‘국민독립당'(National Independence Party), 가장 과격한 민족주의 세력인 ‘군주정당'(Monarchist Party), 국가분리주의에 대해 더 조심스러운 입장에 있는 ‘대중 진영'(Popular Front)  등이 있다.

그루지아인과 오세티안(Ossetian)과 아브카지안(Abkhazian) 소수민족과의 긴장이 있어 왔다.

특별히 남부 오세티아는 그루지아의 중부에 위치한 3, 337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인데, 이 곳에 사는 160,000명의 오세티안은 5세기와 6세기에 몽골의 침략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인데, 러시아 공화국과 접경한 지역인 북부 오세티안과 연합하여 새로운 오세티안 자치 공화국을 결성하려고 해왔기 때문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전 단계로 1990년 11월에 남오세티안 민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아브카지아는 시르카시온(Circassion)과 타타르(Tatar)인들로 구성된 자치구역을 말하는대, 소비에트 헌법 아래서 그루지야 공화국의 관할 아래 있었다. 최근에 아브카지아가 자기들의 영토를 러시아공화국으로 귀속시키라고 요구하면서, 그루지아와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그루지아와 아브카지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그루지아인과 공화국 내의 아르메니아인 사이에도 상당한 긴장이 있다.

경제

농업 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도 발전하였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고 있다. 그루지야는 다양하고 기계화된 농업과 함께 산업도 잘 발달하였다. 수력발전, 광물 채취, 기계 생산 등으로 유명한데, 내륙에는 석탄, 석유, 망간, 대리석 등의 천연 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

재건한 트키불리 탄광을 중심으로한 석탄 산업은 광업의 선두격이다. 치아투라의 망간 저장량은 인도, 브라질, 가나의 그것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망간을 비롯한 비철 금속 산업은 구소련 전역에 다양한 산업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수력 발전 자원 또한 상당하다. 이러한 발전 능력과 연료 공급력은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식료품 생산품들로는 통조림 식품 뿐만 아니라 차, 포도주, 담배 등이 있다. 그루지야의 포도주는 구소련 전역에서 이미 명성을 쌓았다. 브랜디와 샴페인도 잘 발달된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그루지야는 구소련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경작가능한 땅이 적어서 농업 지대가 적고, 경작하기도 어려워서 경작 가능한 땅의 가치가 매우 높다. 그리고 차와 감귤류와 같은 노동집약적인 작물의 생산은 대단히-수익성이 높다. 특별히 차는 구소련 전체의 생산량의 95퍼센트를 점하고 있다. 사탕무우와 담배는 다른 상업 작물 중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제라늄, 장미, 쟈스민 등이 향수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그루지야의 수송 체제는 별로 여유가 없다. 대부분의 화물은 철로로 수송되지만, 산악지대에서는 육로가 승객과 화물을 나르는 주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바투미와 포티 항구는 트랜스코카서스 전역에서 경제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구소련의 주요 도시를 잇는 항공로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사회

  • 인구 1만명당 의사 수: 36.4(1970), 48.1(1980), 58.0(1988)
  • 중급의료요원 수: 91.7(1970), 111.9(1980), 124.9(1988)

그루지야의 의료수준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그루지야는 수많은 미네랄 온천들과 태양이 내리쬐는 혹해 연안의 기후, 산악 지대의 맑은 공기 등으로 인해서 여러 곳에 휴양지가 있다. 교육적으로도 그루지야는 구소련 공화국들 가운데서 높은 편이다. 트빌리시 국립대학교가 1918년에 세워졌으며 , 과학원이 1941년에 세워졌다.

역사/종교

기원전 1세기 초에 이미 그루지야의 조상들이 아시리아의 운하 지역에 나타났고, 그 후에는 우라르투(아르메니아)에 나타났다. 이 가운데 디아우히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들은 타오코호이의 조상들로서 이들이 바로 타오라는 남서부 그루지야 지방에 정착했고, 콜치안의 조상안 쿨카는 흑해 동쪽 끝의 넓은 지대를 차지했다.

기독교가 AD 330년부터 전래되었댜 그루지야의 개종은 포로로 잡혀온 여인인 성 니노(St Nino)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후 3세기 동안은 그루지야는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서 갈등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7세기를 넘어가면서 국가적인 부흥이 있었고, 그루지야인과 이베로-코코사서족들이 그 땅을 차지하면서 통일이 된다.

그러나 1220년부터 몽골의 침략이 계속되면서 그루지야의 황금기는 끝을 맺게 된다. 1453년에 오토만 투르크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당하자 그루지야는 서구의 기독교 세계와 단절된다.

그래서 1510년에 투르크는 이메레티아를 침략해서 수도인 쿠타이시를 점령한다. 이반 4세 등 러시아의 황제들이 기독교 왕국인 그루지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슬림 세력을 막아내고 그루지야를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 후 투르크인들은 페르시아의 정복자인 나데르 샤에 의해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다시 산악민들의 거센 저항과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인해서 이곳에서는 다시 페르시아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이 지역은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독립성과 영토 보존권을 인정했다.

그루지야는 18세기 중반까지는 200년 동안 독립 왕국이었으나, 그후에 제정 러시아에 흡수되었다. 1차 대전 이후 잠깐 독립되었으나, 곧 1921년에 소련 연방에 편입되어, 1936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루지야 곳곳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졌는데, 이러한 저항은 야수적인 공격으로 무참하게 진압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비극의 주인공인 스탈린은 그루지야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1918년 5월 26일 그루지야는 독립국가가 되었고, 독일의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나 1918년 중심 세력이 무너지면서 다시금 영국의 점령 하에 있게 된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루지야는 오랜 기독교 터전 위에서 기독교적인 전통을 지켜왔는데, 그러한 전통은 이슬람 세력 등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었다.

문화

죠지아는 풍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민족으로서 일찌기 5세기에 이미 문자를 발명했다. 이러한 전통이 그들의 삶의 양식에 배어 있다. 1,500년의 전통을 가진 그루지야 정교회는 그루지야의 문화, 특별히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자기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구소련에 편입이 된 뒤에도 지속되었다. 이들의 고대 문화는 여러 수도원과 교회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기념관 건축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그루지야의 건축은 비쟌틴 양식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기도제목

  1. 그루지아 정교회의 영적 각성을 위해
  2. 도시인들이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개방성을 가지도록
  3. 그루지아 교회 가운데서 자기 민족을 복음화할 사역자들이 많이 나오도록
  4. 그루지아어로 된 성경 및 인쇄물이 많이 보급되도록
  5. 그루지아어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어, 좋은 영향을 미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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