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선교지의 비타민

한국선교연구원 주: 이 글은 중국어문선교회에서 발행하는 <중국을 주께로>에 실린 것으로, 중국어문선교회의 동의를 받아 게재합니다. 이 외에도 <중국을 주께로>에 실린 글을 읽기 원하면, 글 하단의 배너를 눌러주세요.

중국을 주께로 제134호(2013년 11,12월호)
특집 제목: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안산 중국인 사역
발행: 중국어문선교회

노재은 | 한국어 강사

‘한국어 가르치기에는 이제 이골이 날만도 하다!’ 싶은데도 가르칠 때마다 새롭다. 19년 가까이 안산중화교회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요즘 드는 생각이다. 늘 새롭다. 교회는 이름을 여러 번 바꿔가며 지금의 안산중화교회가 되었어도, 이제 20살의 청년이 되어 내게 익숙한 곳이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사람들은 늘 한국어를 낯설어 하고 힘겨워하는 새로운 사람들이다.

선교하고 싶다구요?
만약 선교사에게도 스펙이 필요하다면, 한국어강사 자격증이나 사회복지사 자격증 등이 스펙 우선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한류열풍으로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한국어교사 자격증은 선교지에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외국에 나가 한국어를 가르치면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선교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단순하게 한국어교사 자격증 취득에서만 멈추지 말고, 선교지로 나가기 전에 외국인이 많이 있는 교회에서 실습을 하고 나간다면 선교지에 가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말을 늘 하는 한국 사람이니까 당연히 잘 가르칠 수 있을 거라는 당연한 생각에 그저 들떠 선교지로 향한다. 사실 실습을 마치기까지의 과정이 생각보다 길고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지기에 가능하면 멀리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선교를 하고 싶은데 선교지에 나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계속 국내에서 주저주저하며 지내는 이들도 많이 봤다. 물론 선교지로 나가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좋지만 요즘은 국내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선교를 할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 결혼이민자들, 유학생들도 많기 때문에 나라 밖으로 나가는 선교만 목표로 하는 것보다 국내를 세계적인 선교무대로 삼아야 한다. 특히 한국에 들어와 있는 중국인은 이 안산 땅만 해도 아주 많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쉽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다. 중국 현지에 가서 외국인이 복음을 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어도 잘 해야 하고 중국의 문화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게다가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한 가운데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조심스레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한국에는 중국인유학생들이 아주 많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아주 많다. 중국인유학생,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중국에 가지 않고서도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어도 배우고 덤으로 예수님도 만나고
내가 중국선교에 발을 디디게 된 1989년 당시, 나는 방송통신대 중국어과에 다니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아직 중국과 수교를 맺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 들어와 서울역에서 약재를 팔았다 그 당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학과 안에 ‘중국어 성경반’ 이라는 동아리가 있었는데 그 회원들이 대거 ‘중국어문선교회’의 활동에 동참하고 있었다. 처음 중국어문선교회 식구들과 서울역에 약재를 팔러 오는 조선족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고, 결신하는 이들을 시청역 뒤 CCC 정동회관으로 초정해 같이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계속하여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신림동에 있는 ‘사랑의 집’ 이라는 곳에서 같이 합숙하여 살며 성경공부를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경건의 시간을 갖고 여러 목사님, 전도사님들이 이곳에 오셔서 구약개론, 신약개론, 등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을 가르쳐 주셨다. 밤이면 일대일 성경공부도 하였다. 이렇게 사랑의 집에서 배운 중국 조선족들은 신학교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중국에 들어가 전도를 하겠다며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조선족이라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한국어를 못하는 조선족들에게 일대일 성경공부와 함께 한국어도 가르쳤다.

  1991년에 중국어과를 졸업했으나 막상 중국어를 사용할 곳이 없었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중국과 수교도 안 된 상태였기에 사용할 곳이 더욱 더 없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 이후 산업연수생제도(産業硏修生制度)1저개발국 외국인에게 기업연수를 통하여 선진기술을 이전하기 위한 제도. 개발도상국과 경제협력을 도모하고 기업연수를 통하여 선진기술을 이전하기 위한 제도이다. 1993년 11월 도입되어 국내 3D산업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소하는 창구역할을 해왔다. 시행 초기에는 연수기간이 2년이었으나 1998년 4월부터 연수 뒤 소정의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1년간 국내에 취업할 수 있도록 보완하였고, 2001년 12월에는 연수기간을 1년, 취업기간을 2년으로 조정하였다. 연수생은 초기 2만 명에서 2002년 14만 5500명으로 증가했으며, 관련 국가도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 14개 국으로 증가되었다. 연수생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내국인 근로자와 동일한 노동법이 적용되나, 다수가 근무지를 이탈하여 불법체류하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며 인권유린이라는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고, 인력수급에 있어서 관련기관의 비리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자 2004년부터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함께 실시되고 있는데, 2005년에 1사업장 1제도 원칙이 폐지되어 외국인 노동자 수급이 고용허가제로 집중되면서 훨씬 수월해졌다. 이 제도는 향후 고용허가제로 대체되며 폐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출처 | 두산백과>의 시행으로 안산의 반월과 시화공단에 중국인 및 아시아권 나라의 산업연수생들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선교사님이 안산에 세운 중국인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중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사실 나도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몰랐고, 어디에서 한국어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시작했다.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어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 가지고 시작했다. 하지만 가르치기 시작하자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사실이 너무나 쉽게 드러났다.

  1994년 당시 우리 교회에 중국인들이 100명에서 150명 가까이 나왔는데 대부분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오는 사람들이었다. 믿음이 있어서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한국어를 배우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형제자매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할 때는 중국어를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해서 가르쳤다. 중국인 형제자매들이 나에게 배우고 싶은 말을 중국어로 이야기하면 나는 그것을 번역해서 발음만 가르쳤다. 이 방법은 기초도 없이 발음만 가르치니까 응용력이 생기지 않아 한 가지를 가르치면 한 가지만 알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배우게 되니까 서로들 중국어로 말하고 한국어로 가르쳐 달라고 했다. “월급 언제 줘요?”, “때리지 마세요.”, “언제부터 출근해요?”, “욕하지 마세요.” 등등. 지금 생각하면 참 창피하고 어설픈 방법으로 한국어를 가르쳤었다. 대학교 내의 어학당에서 근 10년 정도 가르치고 있는 지금이야 문법 설명은 거뜬히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왜 이렇게 되는 것이냐고 물으면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교과서도 별로 없었고, 문법에 대해 설명해 주는 책도 없었고, 문법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 또한 이런 문법의 규칙을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도 몰랐다. 모두가 내가 연구해서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틀리게 가르친 부분도 꽤 있었다. 이렇게 나의 무지함을 알고 이런 것들을 잘 가르치고 싶어서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러는 중에 1998년쯤에 ‘외국어로서 한국어 교육’ 전공이 연세대와 경희대의 교육대학원에 신설됐다. 나는 때마침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옳다구나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내 스스로 느꼈던 답답함이 조금씩 조금씩 풀려져 갔다. 이렇게 가르치면 되겠구나하는 생각들이 시상처럼 떠올랐다. 자세히 설명해 주고 대답해 줄 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던지!

  그 기쁨은 교회 내에서 한국어 수업을 활기가 넘치게 했다. 한국어 교실은 중국인들에게 예수님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접촉점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 힘들게 일할뿐 아니라 주·야간 교대로 일하기 때문에 늘 피곤에 절은 상태로 수업에 참석한다. 그래서 수업을 따라가기란 너무나 벅차다. 공부를 하지 않던 사람들이라 외우는 것을 아주 힘들어 한다. 거기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이다. 일주일간 일을 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머리와 혀가 굳어 있는 상태에서 한국어 발음을 따라 하고 설명을 들으며 이해하기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다. 외운다고 부지런히 외워보지만 외운 만큼 잊어버린다. 자신들이 매번 잊어버리니까 매우 미안해하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은 꾸준히 나와 한국어를 배우고, 덤으로 예수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누린다. 자신이 한국에 온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온 것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너무 멀어도 가야하는 길 – 한국어 교실
이렇게 교회 내의 한국어 공부는 한국어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한국 문화를 익히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접촉점이 된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 내의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 가운데는 집과 학교만 왔다 갔다 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래서 한국인 친구를 사귀라고 하면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할지 모른다고 한다. 학교 내에 한국 학생이 그렇게 많은데도 학생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만나 친구를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형제자매들은 교회에서 배운 한국어를 직장에서 한국인과 일하면서 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배우는 속도가 빠른 형제자매 중에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전에 산업연수생으로 왔던 외국인들은 하루 15시간에서 20시간의 강도 높은 일을 하면서도 30만 원에서 40만 원 정도밖에 돈을 벌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산업연수생제도가 없어졌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3D업종의 일을 기피하면서 외국 근로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루 15시간의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주일까지도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결국 삶을 규모 있게 관리하기 힘들게 된다. 주님을 영접한 형제자매들조차 돈 때문에 주일에도 일한다. 그래서 체계적인 한국어 수업을 할 수가 없다. 또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자면 온전히 집중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3-40평의 교회에 한 쪽에서는 한국어 공부, 한 쪽에서는 중국어 공부, 한 쪽에서는 상담, 한 쪽에서는 피아노나 기타 등 악기를 연주한다. 소음에 신경이 분산되어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한국어 공부에 매달리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교회에 출석해 한국어를 배우는 중국인들은 신앙적인 체험이 없어 조그마한 사건에도 시험에 들고 기복이 심하다. 또 아직 믿음이 좋지 않아 주일에도 일을 할 수 있으면 일을 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일이 없으면 한국어를 배우러 온다.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우려면 최소 3개월에서 6개월, 가능하면 1년 이상을 매주 나와야 순서적으로 배울 수 있는데 이렇게 제대로 나오는 사람은 드물다. 매주 학습 자료를 부지런히 준비해 가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난주에 배우러 온 사람들과 이번 주에 배우러 온 사람들이 달라질 때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르친 부분을 매번 가르친다거나 준비해 온 자료를 사용하지 못하고 도로 가져올 때는 맥이 빠진다. 내가 이런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왕복 5시간을 허비하며 다녀야 하나 생각할 때도 종종 있다. 이럴 때마다 중국에서 선교하기는 이것보다 더 힘들 거라고 애써 나를 위로하며 참는다. 나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외국어를 배우는 일이 아주 쉬운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매일 두 세 시간씩 노력해도 배우기 힘든 외국어인데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마음만 가지고 온다. 문법사항이 많고 한국어에는 받침도 있어 단어의 변화가 많기 때문에 중국인이 배우기 힘든데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노력하지 않고 배우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오는 학생을 보고 있자면 참 답답하다. 공부를 하러 왔다고 하면서도 볼펜이나 공책도 없이 아무 준비 없이 오는 사람들도 있다. 가르쳐 주는 것도 모자라 기본적인 학습 도구까지 모두 제공해야 할 판이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면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생각이 더욱 들기 마련이다.

지금 안산중화교회의 한국어 교실은 잠깐 쉬고 있다. 9월 중국 형제자매 탐방 이후로 잠시 쉬고 있는 상태다. 배우려는 형제자매들은 있는데 꾸준히 나오는 형제자매들이 없다. 안산중화교회의 한국어 교실은 3개월이면 3개월, 6개월, 1년 등 기간을 정해서 한국어를 가르치지 못한다. 계속 꾸준히 나오는 형제자매들이 없기 때문이다. 6개월 전만 해도 매주 빠지지 않고 나오는 형제자매들이 있어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요즘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형제자매 중에는 한국어가 어려워서 포기한 사람이 많다. 그냥 같이 예배드리며, 식사봉사하며, 청소하며, 한 마디씩 한국어를 가르치고 나는 그들에게 중국어를 한 마디씩 배운다. 그리고 가끔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어 찾아오는 중국인들에게는 바로 가르쳐 준다. 하지만 그 다음 주에는 일을 하느라고 교회에 나오지 못하여 한국어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되고, 몇 주후에 오면 또 다시 자모음 발음 공부를 하게 된다. 한국어 공부의 기초인 자모음 발음공부를 하지 못하면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자모음 발음공부가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중국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어렵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이 한국어를 접촉점으로 중국인들을 자연스럽게 만나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1명의 중국인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것이다. 지금은 쉬고 있지만 항상 대기중이다. 한 사람의 중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러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면 나는 기꺼이 그를 가르칠 것이다. 내가 중국인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열매가 주렁주렁
올 9월에 처음 우리 교회에 다니다가 중국에 들어 간 형제자매를 만나러 산동지역에 다녀왔다. 중국에 돌아와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주일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형제자매도 만났고, 중국에 돌아와 교회를 정하지 못하여 방황하다가 일에 치여 힘들어 하는 형제자매들도 보고 돌아왔다. 힘들어 하는 형제자매들에게는 집에서라도 가정예배를 드리라고 용기를 주고, 자신의 가정에서 가까운 지역에 사는 형제자매들과 같이 만나 서로 교제를 나누라고 권면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주자주 그들과 신앙의 교제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중국 심방 길에 우리 교회에서 한국어를 배웠던 5명의 형제자매를 만났다. 처음 나를 만나서는 한국어를 다 잊어버렸다고 굉장히 미안해했는데, 하루 정도 지나니 한국어로 떠듬떠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르친 후에 느끼는 보람인가 보다.

  들어간 지 7-8년 된 A가정은 한국에 있을 때 우리교회에서 결혼한 제 1호 형제자매다. 이제는 한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 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약간의 인사와 안부를 물을 정도는 알고 있었고, 지금은 삼자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아이가 벌써 8살이었다. 자매는 그 삼자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부부가 예쁘게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고 있었다.

  B가정은 우리 교회에서 결혼한 제 2호 형제자매다. 중국에 들어간 지는 2년 정도 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자매가 불법체류로 잡혀 중국으로 들어올 때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 아이가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B가정의 형제자매는 한국에 있을 때 한국어 교재 3급 중간까지 공부를 한 형제자매였다. 이렇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직장에 나가서는 중국인 한국인 가리지 않고 전도를 했다. 거기다 일주일 한번 공단에 나가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형제자매였다. 자신들은 평신도로서 자신들이 있는 장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라고 하며 매일 15시간의 고된 일을 하면서도 부부가 저녁에 자기 전에 기도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힘들어 하는 형제자매들을 도우며 상담을 도맡아 해 주었었다. 한국인 사역자들이 중국어 실력이 부족하여 힘들어 할 때 많이 도와주던 일손이었다. 지금은 이런 형제자매가 없어 좀 아쉽기는 하다. 우리교회에 모범이 되는 형제자매였었는데, 중국에 돌아가서는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예배도 잘 드리지 못하고 있었고, 직장도 정착하지 못하여 안타까웠었다. 아직도 기회가 있다면 한국에 다시 나오고 싶다고 했다. 불법체류로 잡혀서 들어간 사람들은 5년간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의 중국은 이단이 아주 많은 가운데 가정교회에 가면 이단이 아주 많아서 자신들은 이단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어서 교회를 정하기가 힘들다고들 했다. 그래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이 가정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 살고 있는 교회에 출석했던 형제자매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예배를 드리라고 했다. 또 부근에 살고 계신 선교사님을 연결하여 이 가정과 이 가정에 모이는 형제자매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왔다. B가정의 형제자매는 한국어를 다 잊어버렸다면서 굉장히 미안해했었는데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까 다시 생각이 나는지 주일날 예배 설교를 한국어로 해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고, 우리를 그 도시 부근에 살고 있는 여러 형제자매 집으로 안내해 주었는데, 한국어로 곧잘 이야기하며 다녔다.

  C형제는 들어간 지 6년 정도 된 것 같다. 이 형제도 불법체류로 잡혀서 중국에 들어간 형제다. 중국에 돌아가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고, 직장생활도 잘하고 있었다. 직장은 한국인이 세운 용역회사로 지금은 용역담당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한국인 사장님께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지만 너무 어렵다며 엄살을 떨면서도 매주 참석하여 공부를 했었다. 비록 한국어 2급 정도 밖에 하지 못했지만 지금도 한국어를 조금씩 사용하며 일하고 있었다. 이 형제도 아쉽게도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형제는 직장과 집이 멀어 주말부부였다. 주말에 시골집에 가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지 못하고 있어서, 그 형제 직장 근처에 알고 있는 선교사님이 계셔서 이 형제와 자주 연락하여 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중에 그들 속에 조금씩 녹아있는 한국어 비타민이 새로운 활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큰 욕심일까?

<중국을 주께로> 134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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