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장로회가 대만에 파송한 최초의 목사, 리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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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주께로 제136호(2013년 3,4월호)
특집 제목: 중국선교의 희망봉, 연합사역
발행: 중국어문선교회

강인규 I 대만중원대학 교양학부 부교수

대만 선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교사 중에 한 사람, 영국장로회에서 대만에 파송한 최초의 목사인 리치에 목사(Rev. Hugh Ritchie 1835-1879, 李彧)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목사와 선교사가 한 팀을 이루는 선교활동
리치에 목사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글래스고우(Glasgow)대학을 졸업하고 런던신학교에 입학하였다. 3학년 때 영국장로회에서 대만으로 파송한 매션 목사(Rev. David Masson, 麥大闢)가 큰 풍랑을 만나, 선교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풍랑에 휩싸여 사망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때 그는 대만선교로의 부르심을 받고 재학 중에 목사안수를 받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1867년 12월 13일 치허우(旗後)에 상륙하였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리치에 목사가 대만에 부임하기 2년 전, 맥스웰 선교사가 이미 대만선교의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1865년 5월 28일, 맥스웰 선교사는 세 명의 우원수이(吳文水), 천즈루(陳子路), 황자즈(黃嘉智) 조교와 함께 메타(META)호를 타고 대만 남부의 다거우〔打狗, 현재 까오슝(高雄)〕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는 당시 대만성의 수도인 타이난(臺南)을 선교기지로 삼고 의료활동과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국의사들이 아이들의 눈과 심장으로 약을 만들어 판다는 헛소문이 대만인들 사이에 퍼졌다. 또한 그 지역 의사들의 질투는 극에 달하여 배외사상을 자극함으로써 민중을 선동하여 병원과 교회를 공격하고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맥스웰 선교사 일행의 생명까지도 위협을 당하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타이난 현령(縣令)이 직접 사태를 수습하였지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 타이난에서 24일간 의료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영국영사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치허우로 갔다. 영국영사의 보호와 도움으로 방을 쉽게 얻었고 의료 및 전도활동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리치에 목사는 맥스웰 선교사의 환영을 받으며 대만에 무사히 도착하였지만, 마침 영국 상인이 장뇌(樟腦)를 밀수한 사건으로 대만인들이 비터우(閭頭)교회를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대만 초기 신도인 주앙칭펑(莊淸風)이 민중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으로, 뜻하지 않은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건이 신속하게 수습되었고 이것은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강하게 되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2년 전에 파송을 받은 맥스웰 선교사(Dr. James Laidlaw Maxwell M.D, 馬雅各, 1836-1921)는 의료선교사였기 때문에 세례의식 등을 집례 할 수가 없어 목회에 불편함이 많았었다. 그래서 중국선교 초기에는 목사와 의료선교사가 한 팀을 이루어 선교활동을 폈으며, 리치에 목사는 이러한 대만선교의 기초를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치에 목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
1869년 1월 31일, 리치에 목사는 비터우교회를 재건축하고 활동영역을 계속 남부 지역으로 넓혀 갔다. 그는 먼저 아리강(阿里港)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남부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그는 아리강을 중심으로 대만에서 제일 보수적인 한족(漢族)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 당시의 한민족은 푸ㅤㅈㅖㄴ성(福建省) 대만 남쪽에서 이민 온 민난(閔南)인과 중국 중원 지역에서 유랑 온 객가인으로 형성된 민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대만어와 객가어(客家語)를 동시에 배웠다. 가장 보수적인 한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몇 년 되지 않아 그 지역에 교회가 하나둘씩 세워졌다. 그가 4년 만에 남부 지역에 개척한 교회로는 아리강(1869),동강(東港, 1870), 류추(琉球, 1870), 아허우(阿銳, 1871), 주짜이쟈오(竹仔脚, 1871), 옌푸(鹽璵, 1872), 난짜이컹(楠仔坑, 1873), 챠오짜이터우(橋仔頭, 1873) 등 이다. 짧은 시간에 리치에 목사에 의해 개척된 8곳의 교회는 원주민들에게도 눈을 돌려 복음을 전하는 초석이 되었다. 원주민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동부 지역을 향해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나갔다. 그래서 리치에 목사는 대만 동부 지역을 개척한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동부 지역에 쉰광아오(廣澳), 스파이(石牌), 스위산(石雨山), 리농(里弄) 등에도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전도사양성반 설립
이렇게 빠른 속도로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게 되니 선교사들은 교회를 직접 관리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교회를 맡아 목회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그래서 그는 치허우교회에 ‘전도사양성반(傳道士養成班)’을 설립하여 동역자들을 양성하였다. 처음에는 4명의 학생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리치에 목사는 성경을, 펑후(澎湖)의 수재 린ㅤㅈㅖㄴ진(林兼金)은 중국경전을 가르쳤다. 이 전도사양성반은 1876년에 리치에 목사가 안식년을 맞아 영국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리치에 목사가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선교지에 돌아왔을 때 바클레이 목사(Rev. Thomas Barclay, 1849-1935)와 캠벨 목사(Rev. William Campbell, 1841-1921, 甘爲霖)의 노력으로 타이난과 치허우 두 곳의 전도사양성반을 병합하였다. 전도자양성반은 이후에 신로우(新樓)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구약, 망원경을 통해 토성, 목성, 달의 운행원칙을 배우는 천문, 지리 등을 강의하였다.

남자중학교 설립에 밀린 여자학교
리치에 목사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전도사양성반을 통해 현지 동역자들을 배출하였고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타이난에 여자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1879년 그는 부지만 확보되면 모든 건축비용은 스스로 책임지고 모금하겠다는 조건으로 타이난교사회(臺南敎士會)에 여자학교 설립 부지를 신청했다. 그러나 타이난교사회에서는 여자학교보다 남자중학교의 건립이 더 시급하다고 하여 그의 의견을 보류하고 수렴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계획은 조속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남존여비의 보수적인 사상이 팽배한 대만 사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것은 아주 고무적이고 진취적 선교자세라는 평가를 받는다.

리치에 목사 사모의 여학교 창설
1879년 9월, 리치에 목사는 학질에 걸려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대만선교에 헌신한 지 11년 밖에 안 된 때였다. 리치에 목사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부인은 대만에 머물면서 남편이 이루지 못한 여자학교를 설립하고 대만의 부녀자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했다. 리치에 사모는 무엇보다도 남편의 유업을 완성하기 위해 영국장로교 해외여선교회(Women’s Missionary Association)에 대만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해외여선교회에서는 그녀의 뜻을 수락하여, 대만에 파송한 최초의 여성선교사가 되었다. 그녀는 주로 여자학교를 세워 관리하고, 교회에서 부녀자들을 지도하고, 현지 부녀자 동역자들을 훈련시키는 등 주로 부녀자 사역에 중점을 두었다.

리치에 사모가 대만에 계속 남아서 여성선교사로 활동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는 타이난교사회에서 조차도 여성선교사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더욱이 여 선교사가 성경을 가르친다거나 기도회를 인도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토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남성선교사들과 평등하게 사역을 할 수 없었다. 리치에 사모가 봉착한 난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그렇게 남편의 유업을 완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리치에 사모마저 과로로 쓰러졌다. 1880년, 그녀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 1년 동안 휴식을 취하고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곧바로 대만에 다시 돌아와 계속해서 여학교 창설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3년 동안 애쓴 끝에 드디어 학교건립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리치에 사모는 건축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300파운드를 헌금하기도 했다. 1884년, 학수고대하던 완공을 눈앞에 두고 완공 1개월 전에 리치에 사모는 병이 재발하여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중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학교는 완공되었는데도 업무를 시작할 수 없었다. 이래저래 3년이 지난 1887년 2월이 되어서야 학생모집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워진 여자학교는 지금의 타이난 장영여자중학교(長榮女子中學校)의 전신이 되었다. 또한 이 학교는 청말 대만에 세워진 최초의 여자학교로 자리매김했다. 대만의 남자중학교가 이 여학교보다 10년 뒤인 1894년 신러우에 겨우 창설된 것을 보면 리치에 목사와 사모의 안목과 선견지명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타이난 장로교여학교 개교 일지
학교가 어려움 가운데 마침내 완공되었지만 리치에 사모가 병으로 갑작스럽게 귀국하고, 더욱이 중불전쟁으로 학교가 개강을 할 수 없었을 때, 영국장로회에서는 이 학교의 개강을 위해 특별히 두 명의 여 선교사를 대만에 파송했다. 그들은 각각 슈트아트(Miss Joan Stuart, 朱約安)와 부틀러(Miss Annine Butler, 文安)로 1885년 11월 대만에 도착했다. 여학교 개학준비를 서두르며 대만어를 부지런히 배웠다. 그 후에 부녀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에 참여했다. 1886년 11월 마침내 〈교회공보〉에 여자학교 학생 모집요강을 발표했다.

7개 항목의 모집요강

  1. 8세 이상 여자아이들이 입학할 수 있다.
  2. 학교는 침대, 모기장, 이불 등 각종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들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학생들은 자기들이 입을 옷만 준비하면 된다.
  3. 학생들은 매 학기마다 식비 2원을 지불해야 한다.
  4. 교과목은 백화문(현대 중국어), 글쓰기, 산수, 재봉, 등이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과목으로 어려서부터 성령에 감화되도록 한다.
  5. 학교는 식사 및 비교적 힘든 일들은 인부들을 고용하지만, 비교적 가벼운 일들은 학생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한다.
  6. 도서, 공책, 붓 등 학습문구들은 학교에서 제공한다.
  7. 이 학교에 입학하는 모든 여자아이들은 ‘전족(纏足)을 해서는 안 되며, 이미 전족을 한 학생들은 반드시 이를 풀어야 한다.

학생모집은 예상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18명의 학생들이 입학했다. 1887년 2월 14일 오후 3시에 타이난 신로우에서 개학예배를 드렸다. 학교명은 ‘타이난 장로교여학교’로 짓고, 슈트아트 전도사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 학교의 교육이념과 목표는 복음사역에 필요한 동역자 양성이다. 이 학교는 교육을 통해 봉건적 남존여비 사상을 타파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였다. 그 역사적 의의와 가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학교 설립초기에는 학생모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전통적 봉건사회에서 여자아이들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슈트아트 교장과 부틀러 선교사의 헌신적인 설득으로 간신히 18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이는 정말 대단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 학생들은 학교에서 현대적 교육 외에도 식사와 재봉 등 생활에 필요한 훈련도 함께 배우는 전인적 훈련을 받았다. 이렇게 훈련을 받고 졸업한 여학생들은 각처에서 봉사할 때 호평을 받았다. 이로 인해 여자학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입학하는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나, 1900년에는 전체학생이 60명으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1923년에는 ‘장로교여학교’로 개명하였으며 학생 수가 250명으로 대폭 늘었다. 1939년에는 일본학제 따라 4년제 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으며, 학생 수가 무려 650명에 이르렀다.

보지 못하는 곳을 보는 여성선교사의 눈
슈트아트와 부틀러 선교사는 여학교의 교육사역 외에도 대만 사회에서 부녀자들이 아기를 출산할 때 봉착하는 많은 어려움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부녀자들의 인식도 보수적이어서 임산부가 아이를 낳을 때 남자의사의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상황을 발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로우의원에서 조산(助産) 훈련을 받았다. 이 조산훈련을 통해 임산부의 사망률을 줄이고, 이런 기회를 이용해 임산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계획은 타이난교사회에서 거부당했다. 그들은 부득이 다거우에 있는 세관 소속, 의사 메이어(Dr. W. W. Myers)에게 도움을 요청해 이 조산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안식년으로 영국에 돌아갈 때까지 이 조산훈련을 받았다. 그녀들은 대만 사회에서 부녀자들의 교육, 조산, 사회적 활동 등 매우 광범위하게 활동했다. 대만 사회에서 부녀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데 크게 공헌했다.

<중국을 주께로> 136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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