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산동 선교 100년 ① 선교를 시작하다(1913~1917)

한국선교연구원 주: 이 글은 중국어문선교회에서 발행하는 <중국을 주께로> 에 실린 것으로, 중국어문선교회의 동의를 받아 게재합니다. 이 외에도 <중국을 주께로>에 실린 글을 읽기 원하시면, 글 하단의 배너를 눌러주세요.

중국을 주께로 제137호(2013년 5,6월호)
특집 제목: 조선족사회와 교회를 재조명하다
발행: 중국어문선교회

정리 I 중국을주께로 편집부

100년 전 바로 이 무렵인 1913년 5월의 어느 날, 중국 웨이하이(威海)항 근처에 있는 웨이하이 예수교강서당(講西堂)에는 40대 초반의 조선인이 책상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리저리 생각하니 죄 없이 정배 온 모양이나 이것저것 덮어놓고 신령계로 생각한즉 감사하고 기쁜 마음 태평양도 부족이라 시시마다 홀로 앉아 동천 향해 기도하며 삼위 주께 통정하나, 이곳 인생 형편 보면 가긍하고 가련하오. 많고 많은 숫한 인종 박의박식 가련하되, 동네마다 좋은 집은 우상 봉사하는 묘요, 부녀들의 정형 보면 가련한 중 극하도다…”

이 조선인은 황해도 재령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태로(朴泰魯) 목사였다.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 9월에 총회를 조직하고 그 기념으로 산동선교를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김찬성(金燦星) 목사와 박태로 목사가 중국장로교와 선교문제를 협의하고 현지를 답사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박태로 목사는 산동 선교사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김찬성 목사가 먼저 귀국한 뒤 박 목사님 홀로 남아 본국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선교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9월 하순, 제2회 총회가 끝난 뒤에 박태로 목사와 김영훈(金永勳) 목사, 사병순(史秉順) 목사가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출발하여, 10월 상순에 산동의 라이양(萊陽)에 도착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교회의 산동선교, 그 100년을 맞이하여, 3회에 걸쳐 산동 선교의 모습을 사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산동은 북동으로 황하가 흘러 농토가 비옥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산동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한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이다. 한국에 와 있는 화교의 대부분이 산동 출신이다. 산동은 이와 같이 이모저모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러나 산동은 중국 문화의 중심인 유교의 전통이 그 어느 곳보다 강한 곳으로서, 미북장로회가 1860년대 초반부터 선교에 착수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곳이었다. 한국선교사들은 산동의 라이양(萊陽)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는데 칭다오(靑島)와 옌타이(煙臺) 중간에 있는 라이양은 1900년 당시 인구 100만 명이었다. 이곳은 서구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박태로·김영훈·사병순, 세 선교사는 이곳에서 언어를 배우며 부근의 교인들을 찾아 ‘복음당’이라는 이름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1915년에 이르러 이 교회는 40여 명의 교인을 확보할 수 있었고 3명에게 세례를 줄 수도 있었으며 성탄절에는 인근의 교도소를 방문하여 전도를 하기도 하였다. 이 교회의 자취는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산동 선교는 시작한지 몇 해 되지 않아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박태로 목사가 병으로 1916년 4월에 귀국하고, 김영훈·사병순 목사는 총회 전도국의 허락 없이 선교지를 이탈한 것이다. 어학이나 문화적응 훈련 등 사전 준비 없이 무조건 현지로 달려간 것이 이런 결과를 빚은 것이었다.

1912년 9월 1일,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景昌門) 안 여성경학원에서 열린 제1회 예수교 장로회 조선 총회에 제출된 청원서. 제2항, “로회를 시작할 때에 제쥬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님으로 우리에 깃븜이 츙만한 바이온즉 지금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전도를 시작하되 지라(중국) 등디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청원하오며”, 이것이 한국교회가 100년을 이어오고 있는 중국선교의 팡파르가 되었다. 이 청원서는 황해노회에서 제출했는데, 황해노회는 청원서 제출뿐만 아니라 노회의 중진 교역자인 박태로 목사를 선교사로 선임하는 등 산동선교를 주도하였다. 황해노회의 헌트(W. B. Hunt 韓緯廉) 선교사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이전에 산동에 가서 미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협의하는 등 한국교회의 산동선교를 위해 많은 수고를 했다.

산동선교의 첫 선교사 세 분의 모습
김영훈 목사는 산동에서 미국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의주에서 목회하며 장로교 16대 총회장을 지냈다. 사병순 목사 역시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중국 텐진(天津)에서도 활동하였다. 사 목사의 사모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출옥 후 세상을 떠났다. 사병순 목사도 1940년대 초에 강원도 김화경찰서에서 고문을 받고 풀려난 직후에 철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산동선교의 첫 선교사 세 분 가운데서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분은 박태로 목사이다. 박 목사는 제일 먼저 산동선교사로 선임되었으며 파송 전에 김찬성 목사와 함께 중국교회와 교섭하고 현지를 답사하였다. 중국교회는 한국교회의 선교를 허락하면서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박 목사는 선교활동 중 병을 얻어 귀국하여 요양 중에 있었는데 선교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다시 선교지로 갔다. 병이 악화된 그는 귀국 후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노(魯) 나라가 있던 곳이어서 산동성을 로성(魯城)이라고도 하는데 박태로 목사의 이름에도 이 글자가 들어 있다. 박태로 목사의 아들 박경구 목사는 해방 직후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당했으며, 손자 박창환 목사는 신약학자로 장신대 학장을 지냈는데 현재도 초빙교수로 신약학을 강의하고 있다. 박창환 목사의 손자가 작년에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박태로 목사의 집안은 한국 최초로 5대 목사의 기록을 세웠다.

옌타이에서 라이양으로 가는 길
한국선교사들은 먼저 161km 떨어진 곳에 있는 옌타이에 도착하여 라이양으로 행했다. 예전에는 물론 길도 좁고 비포장이었을 것이다. 지금 라이양은 배가 많이 나서 ‘배의 고장(梨多)’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라이양을 방문하면 배와 관련된 관광상품을 많이 볼 수 있다. 세 선교사가 라이양에 도착하자 세 선교사를 돕기로 했던 전도인은, 자기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말없이 사라지고 이웃에서는 일용품도 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라이양과 관련된 지도들
첫 번째 지도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선교지역도와 선교실적통계’에 실려 있는 ‘산동반도 전도지도’와 ‘조선 산동 급 요동 3반도 형세도’, 두 번째 지도는 방효원(方孝元) 선교사(방지일 목사의 가친)가 작성한 라이양 일대의 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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